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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조 Feb 13. 2016

헬조선 청년이 덴마크를 만났을 때 #2

메마른 마음을 안고 덴마크에 도착하다.

호텔을 나와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아직은 낯설어서 긴장하고 있는 내게 코펜하겐의 밤거리는 특히나 어두워보였다.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 작은 배들이 보이더니 운하가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뉘하운(Nyhavn)이라고 코펜하겐에서 제일 유명한 곳 중 하나라고 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간판에 Nyhavn17이라 적힌 술집에 들어갔다. 호텔에 짐을 내리고는 바로 나온 터였다. 열 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굳어버린 몸과 뒤바뀐 시차에 몸은 엄청 피곤했지만, 왠지 맥주 한 잔을 꼭 마시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 외국에 나오니 드라마틱한 순간을 바랐는지 - 반쯤 눈이 풀려도 따라나온 것이었다. 코펜하겐의 첫 일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운하 옆에 있는 술집 Nyhavn 17. (출처:내사진)


'드디어 덴마크구나.'

비행기 안이 벨트 매는 소리로 분주해졌다. 창 밖을 보니 저 밑에 구름들이 도시의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구름 위로 빛나고 있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디즈니 주인공들에게만 허락되는 풍경이 아닐까 싶은 아름다운  오리온자리가 눈 앞에 있었다.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코펜하겐 위를 날고 있는 이 순간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만 이 설렘 가득할법한 순간에도 한국에서 가져온 무기력함은 마음  한쪽에서 건조한 감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항에 내린 후 전세버스를 타고 코펜하겐 시내로 향했다. 앞으로 일주일을 함께 하게 됐다는 가이드분의 소개를 들으며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하나 둘 덴마크의 건물과 집들이 지나가기 시작하는데 어어. 아.. 아직 덴마크에서 뭘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시큰둥함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정갈하게 늘어선 집들과 건물들, 그리고 창문 안으로 보이는 아늑한 조명과 실내 풍경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세상이었다. 그래 여기가 북유럽이었지. 인테리어의 전설처럼 돼버린 북유럽.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데 5분이 안 걸린 것 같다.


베이징에서 코펜하겐 까지는 아홉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몽골 초원과 우랄 산맥을 넘었고, 두 번의 기내식과 한 번의 샌드위치가 나왔다. 비행시간이 계속 끼니 시간에 걸렸는지 정말 줄기차게 밥이 나왔다. 바로 전 서울에서 베이징에 올 때도 기내식이 나왔었는데, 열두세 시간 동안 이코노미석에 갇혀서 총 네 끼를 먹은 셈이었다. 여전히 기내식에 로망이 남아있어서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었는데, 마지막 식사가 나왔을 때는 왜 입에 넣고 있는지 모른 체 조건반사적으로 먹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밥만 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닭장 안의 닭들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 펼쳐지는 산악지대. (출처:내사진)


출발하기 전 장거리 비행을 앞두고 그 시간에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었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라니. 덴마크도 좋았지만 이 긴 자유시간이 참 좋았다. 처음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이것저것 생각을 했지만, 결국 짐을 늘리는 게 싫어서 음악 듣는 걸 택하고는 스마트폰에 듣고 싶었던 앨범을 여러 개 넣는 것으로 준비를 끝냈다. 그중 가장 회심의 선택이라 할 만 것이 산울림 1집이었다. 밴드로 공연할 때 종종 산울림의 노래를 하곤 했었다. 노래를 알면 알 수록 이 멋진 형님들의 시작점이 늘 궁금했었다. 언젠가 제대로 들어보겠다고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그런 기회를 찾은 것이다. 


산울림의 데뷔는 40년이 지났건만 감동적이었다. 나긋한 목소리 뒤로 넘치는 흥과 감각적인 전개. 정말 좋았다. (앨범에 대한 찬사를 잘 쓸 수 있었다면 음악평론가를 했겠지.) 앨범 한 장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앨범이 나온 1977년이 어떤  해였는지 궁금해졌다. 그 사회의 가장 의미 있는 단면은 방 한구석에서 꿈을 꾸는 젊은이의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마음속에 산울림이 있었나 보다. 더 세련돼 보이거나 누굴 닮으려고 하지 않는, 눈치 보지 않는 외침. 젊었을 때 이렇게 힘껏 외쳐봐야 그 자신감으로 계속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 걸까 싶었다. 


부러웠다. 이제는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아를 찾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청소년기를 지나면 가진 돈의 양으로 남은 삶이 결정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코노미석에 열두 시간만 앉아있어도 힘든데 죽을 때까지 타고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누가 분노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뒤엉켜 서로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로 스스로를 해치다가 기어코 곁을 해치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이들과 나누던 위로와 보살핌은 점점 사라지고, 스쳐가는 타인들이 비슷한 처지의 서로를 보며 '그래 여기가 지옥이었던 거지' 하는 체념을 나누고 있다. 


나는 그런 체념이 싫었다. 스스로에게 화를 눌러 담기보단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을 택했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청년기를 다 써가는 요즘 난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됐다. 최근 1-2년은 혁신을 쫓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한국에서 긍정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혁신을 쫓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것도 잘 모르겠다. 혁신을 해야지만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가 의사, 검사가 돼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던 사회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성공의 수단이 좋은 직업에서 혁신이라는 커리어로 바뀐 건 아닌지. 그런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혁신을 해낸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만큼 리스크를 감당할 여러 자산이 있던 사람들이라고. 


그럼에도 뒤쳐지는 쪽보다 앞서가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결국 다들 나 같은 선택을 했던 걸까?) 머리 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혁신 거리가 뭐가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내 현실은 결국 체념도 혁신도 안 되는 어정쩡함이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고민을 붙들고 있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웠다. 결국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걸 택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던 그때 덴마크가 쑥 들어와 버렸다.


오마이뉴스의 꿈틀비행기라는 덴마크 탐방에 지원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정리를 하던 차에 감사했던 선배 한 분이 내게 강력히 추천을 하셨다. 당시에는 정리를 빨리 끝내고 그냥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지만 단호한 배려에 몸도 마음도 움직였다. 원래 삶의 중요한 사건들은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등 떠 밀림 덕분에 일어난다. 나는 덴마크가 북유럽이라는 것 말고는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도착하고 나서는 생각보다 풍차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풍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풍차는 네덜란드다.)


여행을 위한 짐은 가볍게 준비를 했다. 별 기대도 계획도 챙기지 않았다. 이미 마음에 짐이 많은 탓이었다. 


뉘하운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아직 현실 같지 않던 하루를 엘레강스하게 마무리하려는 그때 잠시 잊고 있던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가이드분이 강조했더랬다. 덴마크의 숙소들은 모두 검소하고 실용적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을 거라고. 뭐 작은 건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작은 곳에 사는데. 문제는 2인실에 침대가 하나라는 것이었다. 한 침대에서 오늘 처음 본 분과 사이좋게 자야 한다는, 남자끼리인데 뭐가 문제겠냐고 말하겠지만, 침대가 조금만 더 좁았으면 정말 어색함에 숨 막힐 뻔했을 사이즈였다. 그래도 이것까지는 미리 이야기를 들었었다. 들을 때와 막상 볼 때는 좀 달랐지만. 정말로 좀 그랬던 건 침대 옆에 반투명 통유리로 되어 있는 화장실이었다. 이건 얘기 안 해줬던 거잖아요. 여기 뭐냐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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