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눈을 떠보니 새벽 두 시였다. 어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최 선생님은 여전히 주무시는 중. 또 깼을 때는 새벽 네 시였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고 이생각저생각 하며 조용히 아침을 기다렸다. 난감한 숙소에서의 첫날밤은 생각보다 잘 넘어갔다.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이불도 두 개였고 침대도 생각보다 넓었으며 무엇보다 피곤함에 뭘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탐방은 아침 여덟 시부터 모여 이동하는 부지런한 일정이었다. 여섯 시 반쯤 일어나 머리를 감고는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호텔의 아침 식사는 이 동네의 일상인 빵, 치즈, 햄, 계란, 요구르트 등이 차려져 있었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하나하나 다 맛있었다. (내 미각을 신뢰하지는 말자. 나는 군대리아도 맛있게 잘 먹었다.) 기대를 갖고 살짝 먹어본 우유는 우리나라 우유보다 좀 싱거운 느낌이어서 신기했다.
아침을 다 먹어갈 때쯤, 식사의 마지막 메뉴를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과감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햄 옆에 놓인 덩어리 - 버터도 치즈도 아니고 두부도 아닌 알 수 없는 덩어리 - 가 있었는데 나이프로 빵에 발라먹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유독 이것만 아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다. 생긴 걸로는 도무지 맛을 짐작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마침 검은색 통호밀 빵도 맛이 궁금했던 터라 빵 한쪽과 'The 덩어리'를 덜어갖고 와서 빵에다 발라 한 입 먹었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짭짤한 빵 맛에 살짝 놀라려는 찰나 뒤이어 퍼지는 강렬한 돼지 비린내에 크악. 스팸과 돼지비계를 생으로 갈아 섞어 만든 돼지 엑기스랄까. (뻥 조금 보태서) 친구가 이걸 먹어보라고 했다면 바로 절교를 선언할 만한 맛이었다. 부르르.
버스에 올라 시내를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이드 ’욱’님의 설명이 시작됐다. 코펜하겐을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자전거였다. 겨울이고 도로엔 눈도 쌓여 있었지만 자동차와 함께 출근하는 자전거 무리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듣던 대로 잘 갖춰진 자전거 전용 도로와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다. 코펜하겐에서 자전거가 활성화될 수 있는 이유는 시설뿐만 아니라 도시의 모든 교통 구조와 생활 시스템이 자전거를 최우선으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히 타기 편한 게 아니라 도시 어디든 자전거를 타면 제일 빨리 갈 수 있게 되어있다고 하니 이용률이 높을 수밖에. (자전거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뒤이은 욱님의 설명이 뜻밖이었다. 자전거 문화가 최고로 발달한 곳이지만 자전거 도둑률도 세계 1위라고 했다. 자전거가 많으니 건수가 많은 건 이해하지만 비율이 1위라니. 이유가 재미있었는데, 술 먹고 남의 자전거 타고 가는 일이 많다 보니 이제는 자기 게 없으면 다들 태연하게 남의 걸 타고 간단다. (본인도 남의 걸 타는 중이라고) 몇 년 그렇게 돌다 보면 다시 자기 자전거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나. 그러다 보니 다들 굳이 좋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정말로 자전거들이 대부분 평범하다 못해 낡은 느낌이었다.
욱님은 재미있자고 해준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 이야길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선진국이라면, 특히 북유럽이라면 당연히 우리보다 더 높은 시민의식을 가지고 모두가 질서를 잘 지키며 살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근데 정신 줄 놓을 만큼 술 먹는 사람도 많고, 내 자전거 없으면 그냥 다시 남의걸 가져가 버리는 모습이라니. 얘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우산이 그런 식이다. 집집마다 자기가 사지 않은 우산 한두 개씩은 다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격대가 좀 다르긴 하다. 덴마크가 몇 배 더 쿨한 듯)
'그래, 여기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랄까. 사회제도가 발달한 북유럽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사회 제도만큼 이상적일 수는 없는 거였다. 사람의 삶이란 어디서나 서로 폐 끼치고 서로 이해하며 사는 과정일 수밖에. 한 사회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겉으로 보이는 제도나 결과물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잘 만들어진 도로와 신호등도 좋지만 돌고도는 자전거처럼 ‘사람'스러운 모습들을 더 봐야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비행기 타고 올 때만 해도 '아이고 의미 없다’ 하고 있던 내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건만 진지하게 덴마크를 살펴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살이었나 싶었지만 분명 마음이 한 없이 지쳐있던 건 사실이었다. 무엇이 이렇게 내 마음을 끄는걸까. 딱히 하나를 집을 수는 없지만 시선이 닿는 곳마다 조금 더 파고들게 만드는 뻔하지 않음이 있달까.
창밖을 보니 버스는 어느새 코펜하겐을 벗어나고 있었다. 첫 방문지인 에프터스콜레로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