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턴, 이직, 이민까지 3년간의 이야기
저와 남편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픽션입니다.
2015년 여름, 유학도 해본 적도 없는 순수 한국 토종인인 둘은 한국에서 미국 인턴을 준비하였다. 가명 같은 영어 이름을 지어 K-move라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며, 미국 인턴 지원하고, 화상 면접을 보고, 인턴 채용이 확정되면 비자 준비를 하고 출국'하는 프로세스를 밟았다. 그 클래스 안에는 20여 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매일 함께 어학 공부를 했고 인턴으로 빨리 채용된 친구들은 그만큼 빨리 떠났다. 그에 비해 우리 둘은 끝까지 남아있던 축에 속했다. 그만큼 Alley는 회사를 고르는 데에 신중을 기했고, Kevin은 한국에서의 취업과 미국행이 갈림길에서 미국행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였다. 2015년, 미국 인턴을 시작했던 때의 우리의 2030대는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였다.
나의 이야기
나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했고, 누구나 알만한 대학원 학위도 따고, 사업을 하며 지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말하자면 남부러워할 것 없는 생활을 보낸 것 같지만, 대학생 때 갔던 뉴욕을 잊지 못해 취업하자마자 1년 적금 통장 2개를 만들어 1년 안에 반드시 뉴욕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으며 이를 악물었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유학원과 미국 취업 에이전시를 돌아다니며 상담을 받았다. 그러나 1년 뒤,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그만두는지, 기약 없는 미국은 또 왜 또 가려는지 부모님께서 걱정에 잠 못 이루시는 것을 보며 잠시 방황을 했더랬다. 사실 미국에 가더라도 겨우 1년 ~ 1년 반을 일할 수 있는 미국 인턴/트레이니 비자로 가는 방안밖에 없었다. 그러나 1년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큰 것을 알기에 도전하려고 하였으나, 부모님의 걱정과 심려에 비하면 그 1년의 가치가 오히려 작았다. 그렇게 1년 동안 준비했던 꿈이 깨지고 어쩌다 보니 대학원의 기회가 찾아왔고 그 대학원을 통해 사업 기회가 주어졌다. 사실 미국에서 글로벌 경험을 쌓고 싱가포르에 가서 또 경험을 쌓고 한국에 돌아와 글로벌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인데, 글로벌 경험 대신 대학원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덕에 또 좋은 기회를 받아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10년이나 빨리 꿈을 이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사업도 시작하였으나 졸업 무렵, 조금 더 오래 사업을 운영하던 동기가 자신의 사업 지분을 조금 주고 하나의 개별 사업부 형태를 만들어 일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였던 게 무산되면서 뼈아픈 경험을 했었다. 이 일 때문에 사업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지만, 글로벌 경험을 하고 차곡차곡, 좀 더 느리게 사업의 확고한 가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10년 뒤의 꿈을 너무 빨리 이뤘다. 결과뿐이 아니라 그 과정을 꿈꾸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돌아가더라도 다시금 미국으로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알아봤고 2015년 6월 미국 인턴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남편의 이야기
남편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대학 졸업을 한 한기 앞두고 있던 이유는 1년 넘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한 뒤 3개월간 남미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중국어 전공이었기에 선, 후배와 동기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인턴을 다녀왔다. 중국으로의 행보는 누가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끌림'은 없었다. 대신 캐나다, 호주, 미국 등의 워킹홀리데이는 한번 가볼만하지 않을까 하고 여러 가지 알아보니 그 당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뽑는 인원이 다른 나라보다 적었기에 캐나다를 선택했다. 깨끗한 나라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 뽑는 인원도 적다 보니 왠지 희소성이 있어 보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지원은 선착순으로 빠른 시일 내에 마감되기 때문에 지원 시작 날 새벽부터 우체국에 가서 우체국이 열 리 자마 첫 번째로 서류를 접수하고 다행히 승인 소식까지 들을 수 있었다. 비행기 티켓과 한 달 생활비를 가지고 캐나다에 가서 어학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학원 생활을 하며 캐나다 찜질방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집을 얻어 룸메이트 생활을 하였다. (그 친구들 중 한 명은 이때로부터 3년 후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와서 만나기도 했다.) 일자리를 찾던 중에 좋은 기회로 캐나다의 한 마을에 작은 호텔에 취직해 매니저로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카지노가 있는 호텔이었기에 매일 겜블을 하러 오는 사람들, 술에 취한 관광객들을 상대하고 가끔 식당에 손이 모자라면 음식도 만들었다. 놀러 갈 곳 없는 곳에서 1년 넘게 일만 하다 보니 25살의 나이에 비해 돈도 많이 모였다. 새롭던 곳이 익숙해질 즈음 한국으로 돌아갈 때라는 것을 직감했고 남미 여행을 한 뒤 한국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바로 출발했다. 첫 번째 비행기 티켓만 끊어서 남미행 비행기를 탔다. 중간에 지진이 나서 대피한 적도 있었고, 한밤 중에 도착한 어떤 곳은 너무 무서워서 공항에서 나가지도 않고 다른 지역으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않고 눈이 쌓인 산을 오르다가 정상을 몇 발자국 앞두고 인간의 한계를 느껴 인생 최초로 포기를 해야만 했던 경험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후회 없는 1년 반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열심히 재학 중이던 중, 대학 축제 때 열린 해외 취업 세미나에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미국 인턴이 맞는지 한국에서 취업을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둘 다 자신이 있었지만 너무나 다른, 큰 갈림길이었다. 이 고민은 해외취업 프로그램에 참가한 뒤, 미국행 항공권을 끊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3년 동안 미국에 왔고, 이직을 했고, 이민을 했다.
2018년 겨울인 지금, 나와 남편은 미국 뉴욕에 3년째 살고 있다. 3년 전 미국에 오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여러 번의 이직을 했고, 이민을 했다. 이민을 했다는 의미는 비자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며 미국에서 공부를 해도 되고 일을 해도 되는... 미국에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해서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