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말이다.
지금이야 담임을 맡고 있지 않지만, 담임이던 시절에는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후딱후딱 가던 때가 있었다. 담임 업무도 일정부분 사이클이 있어서 학생들의 출결을 파악하고 그날의 알림 및 변동사항 등을 알려주는 조회, 그 후 교사 개인 시간표대로 수업, 점심 급식지도, 오후에 종례, 청소 지도를 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이대로만 하루가 진행된다면 얼마나 평온하랴.
그러나 변수가 많아 학부모 상담주간이 오거나 시험이 끝나거나 학급에 일이 생기거나 자잘한 일들을 학생들과 나눠야 하거나 하루, 일주일, 한 달을 꼬박 매달려 있어야 하는 일이 생길 경우, 맡고 있는 같은 반 아이들끼리의 분쟁이 학부모 사이의 일로 커지게 되고 그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선에서 담임이 그 둘을 다 지도하는 입장이 되면 평온한 하루 일과는 멀리 사라지고 학생 상담과 전화 통화, 수업, 학부모 상담, 회의, 끝없는 상담 업무가 반복된다. 그때의 정신적 피로는 육체적인 것과 차원이 다르다. 특히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과 겹치면 야근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어서 포스트잇에 그날의 할 일을 써 붙여 놓고 하나씩 벽돌을 깨듯 격파해야만 했다.
교사가 수업만 하면 얼마나 좋으랴만 아직도 교사가 해야 할 업무는 차고도 넘친다. 사람들은 교사가 주로 수업만 하는 줄 안다. 우리도 수업만 하면 좋겠다. 생활지도나 자잘한 업무 말고 오로지 수업만 전문적으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게다가 한번 수업 준비를 하면 평생 써먹는 줄 알지만, 매번 들어가는 학급과 만나는 학생이 다르듯 날것 그대로인 수업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매번 준비를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같은 내용을 한 주 또는 한 달 뒤에 해도, 일 년 뒤에 해도 몇 년 지나서 해도 새롭다. 새롭게 준비하고 새로운 예를 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니 늘 수업 준비에 바쁘다. 오죽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는 하루살이 인생이라 하겠는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어야 하듯 방학도 그냥 오는 게 아니다. 학생 생활기록부를 쓸 때, 생(生)을 기부하듯 영혼을 끌어모아 업무를 마쳐야 방학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방학이 오면 기쁘다기보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재충전하는 게 가장 큰 소망이 된다.
예전에는 방학이 되면 의무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학교라는 틀에 갇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어두워질까 봐 밀린 친구들과의 만남도 시간을 쪼개서 잡았고, 여건이 맞지 않아 듣지 못했던 연수도 거리를 따지지 않고 다녔으며, 여행을 통해 재충전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면서 세상의 한 귀퉁이에 나를 꿰어맞추고 나름 정보를 적절히 활용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실질적인 재충전의 시간이 나이가 들면서 더 절실했다.
몇 년 전에 퇴직하신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 계실 때도 열정이 넘치던 분이셨는데 퇴직을 앞두고 사진과 서예를 배우고 사진전을 준비하시느라 바빴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사진집을 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다가 과로탓인지 덜컥 병원에 입원하는 지경에 이르셨다. 급기야는 준비하던 책 발간도 미루고 모든 것을 중지한 채, 치료를 받으셔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시던 일 중에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한두 개에 집중했다면 더 큰 효과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시 학년말이다.
코로나로 인해 집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세상은 여행 수요로 들썩인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해외로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하다. 이번 방학에 어디로 여행을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집’이라고 대답하자 의외라는 반응이다.
특별한 장소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 좀 되었다.
드라마 <안나> 마지막 회를 보다가 ‘사람들은 지옥을 공간이라고 생각하잖아, 공간이 아니라 상황인데’라는 말이 가슴에 들어왔다. 같은 맥락이라 신선했나.
하지 않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있고, 오롯이 나와 대면할 때 진정한 휴식이 생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리하여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 그것은 산과 들로 다니지 않아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