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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Feb 06. 2023

테이프를 뜯어낼 땐 (눈 질끈) 한방에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첼로를 하겠다고>

현악기는 건반 악기와 달리 시각적으로 음계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첼로를 배우기 전에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문제인데 막상 배우기 시작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표시가 전혀 없는데 어디가 ‘도’고 어디가 ‘레’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음계가 정확히 구분되어 있는 피아노는 왜 그다지도 못 쳤던거지? 갑자기 궁금하군.)

그래서 초보자들의 악기에는 테이프를 붙여 도, 레, 미, 파~ 자리를 표시한다. 나는 당연히 1년이 넘도록 그 테이프를 떼지 못 했다. 그리고 연주할 때마다 그 테이프 붙은 부분을 눈으로 확인하자니 상체를 자꾸 앞으로 굽히게 되어 자세도 나빠지고 목, 어깨도 많이 아팠다.

하루는 그런 나를 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아는 언니는 십 년 넘게 첼로를 했는데 아직도 그 테이프를 떼지 못 했다고. 이제는 불안해서 뗄 수가 없다고. 헉.

나는 아직은 테이프를 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겨우 1,2년 했는데 아직은 붙이고 있어도 되지 뭐.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십 년이 넘도록 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말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언제 떼어내긴 해야 할 텐데, 아직은 준비가 안 됐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제주에서 잠시 육지로 몇 주 올라가 있게 됐을 때 첼로 운반이 번거로워 성남시 문화재단에서 한 달에 만원에 빌려주는 악기를 대여했는데 그 악기에 테이프가 붙어 있지 않았다. 

강제 테이프 반납. 

이것은 마치 수영 초보자에게서 킥판을, 이제 막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서 보조바퀴를 예고 없이 빼앗아 버리는 것과도 같은 막막함이었다. 

연주가 가능하기나 할까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냥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첫 번째 음계 위치만 제대로 잡고 연주를 시작하자 내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첼로에 음계 표시는 없지만 첫 번째 음정만 제대로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손가락의 간격으로 다음 음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 기준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셈. 침착하게 ‘레’가 여기니까 그렇다면 이만큼 손가락을 벌려 여기가 ‘미’ 이런 식으로 한 발 한 발 음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자전거를 배울 때도 언젠가는 보조 바퀴를 떼고 뒤에서 잡아주던 사람이 나를 놓아 보내는 순간이 필요하다. 끔찍하게 무서운 순간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한참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 비상하는 순간, 혹시라도 추락할까봐 두려울 뿐. 하지만 그러면 또 뭐 어떠랴. 다시 일어나면 되지. 

몇 번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평생 무거운 보조바퀴를 질질질 끌고 다니는 것보단 나을 것이고 그걸 떼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을 땐 기회다 생각하고 떼어버리는 편이 나은 것 같다. 

내 첼로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음계 표시 테이프를 떼어내며 또 한 번 깨달은 진리다. 

보내줄 때가 되면 보내줘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나를 자유케 하리니. 특히 앞으로 자꾸 꺾어지는 목과 상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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