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의 여왕(별 걸 다 적는 여자)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2

by 고고와디디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고 하는 말이 가장 뼈저리게 와 닿을 때는 기억력이 너무 쇠했다고 느낄 때다. 십 대 이십 대 때 한두 번 중얼거려서 외워졌던 것들이 지금은 잘 안 외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십 수 번을 보아도 처음 본 것처럼 아무 기억이 없을 때도 있다.

나이 들어 뇌기능이 떨어진 데다 시대의 영향까지 더해져서 그런 것 같다. 옛날, 그러니까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도 없던 시절엔 전화번호부라는 책에 지인들의 적어두었지만 그걸 늘 들고 다닐 수 없으니 기본적으로 전화번호를 스무 개 이상은 외웠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전화번호 포함 세 개 이상 외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나도 지금 헤아려보니 네 개쯤 외우는 것 같은데 이것도 갑자기 급하게 어디에 적으려고 하면 생각이 잘 안 나기도 한다. 기계가 스마트해질수록 인간은 더 덤해진다고 해야 하나. 인간이든 동물이든 잘 쓰지 않는 기관이나 부위는 진화 과정에서 퇴화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오십을 목전에 두고 이 기억력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것. 아주 간단한 지명이나 드라마 제목, 심지어 사람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친구들끼리 얘기하다 보면 아주 가관이다. 무슨 초성 퀴즈가 따로 없다. (가족 오락관이냐고...) 세 글자 중에 두 글자만 맞춰도 ‘야~ 그만하면 됐다.’고 격려해 주고, 그러다가 누가 갑자기 정확한 이름을 기억해 내면 모두 손뼉 쳐주며 ‘이야 아직 살아있네!’하며 칭찬해준다. 틀리게 얘기했는데, 틀린 걸 알면서도 누구를 말하는 건지 무슨 드라마를 얘기하는 건지 또 찰떡같이 알아듣기도 한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말한다.

“알아듣잖아, 알아들으면 됐어.”


한 번은 친구들과 무슨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남편이 아내의 베프와 바람이 나서 아내를 죽였는데 그 아내가 과거로 돌아가 남편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그런데 이 제목이 생각이 안 난 것. 우리가 그 드라마 제목을 생각해 내겠다고 차례로 댄 것들은 대략,

“<내 남편을 죽여줘!> 아닌가?”

“아냐! <내 남편을 부탁해!>”

“네 남편이 그럴 거라고 했지!”는 아니지?

“그건 아니다 진짜.”

“그럼.... 네 남편이 그럴 줄 알았어!”

“......”

“뭐야아아아~~~~”

정답은 <내 남편과 결혼해 줘>였다. 제목의 의미 자체가 모순되는 거라 생각이 안 날만도 했다, 뭐.


기억력이 이런 지경이라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바로 연습을 하지 않는 이상, 하루 이틀 있다가 첼로를 꺼내고 악보를 마주하면 아~~~ 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냥 수업 시간에 매우 틀렸고, 매우 허둥거렸으며, 다음 시간까지는 연습을 잘 해와야지 다짐한 것까지만 딱 생각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필기다. 물론 말이 글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중간 중간에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다 받아 적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수업을 통째로 (스마트한 기계의 힘을 빌려) 리코딩을 하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는데 그건 선생님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진짜로 그렇게 하지는 못 하고 있다. 처음에는 악보 사이사이에 미친 듯이 연필로 받아 적었는데, 급하게 적다 보니 글씨도 날아다니고 악보 사이에 막 적은 거라 무슨 말인지 잘 해독도 안 되고, 일단 딱 읽기가 싫게 생겼다. 그러면 결국은 또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막 연습을 해가서 지적받았던 부분이 잘 개선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뒤엔 작은 수첩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이 방법의 문제는 연습할 때 수첩을 따로 펴서 대조해 가며 잘 보게 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지금 쓰고 있는 방법은 공간이 비교적 넉넉한 포스트잇을 준비해 가서 열심히 받아 적은 후 관련된 부분 옆에 붙이는 식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되도록 다 받아 적으려다 보니 거의 책에 포스트잇을 도배하다시피 하게 된다.

내 기억력을 완전히 불신하는 나는 정말 별 걸 다 적는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필기만 열심히 하는 애들이 있었다. 노트 정리는 끝장나게 하는데 정말 정리만 잘하고 공부는 안 해서 시험은 잘 못 보는 애들. 그리고 선생님 말씀을 경청하면서 세련되게 꼭 필요하겠다 싶은 포인트만 잡아 깔끔하게 한두 가지만 메모하는 애들이 있었다. 이런 류의 애들은 벌써 공부를 잘할 것 같은 바이브가 막 풍겼다.

지금 나도 세련되게 깔끔한 악보에 한두 가지 포인트만 표시하고 싶지만, 그러면 일주일에 한 시간 하는 수업 시간이 끝난 후, 머리는 하얗게 리셋이 되고, 일주일 내내 헛연습만 해갈 수 있으므로, 미련해 보이고 촌스러운 것 같지만 정말 열심히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받아 적는다.


“손가락 모양 잘 유지, #도 가 계속 조금 높음. 2번 손가락 자꾸 벌어짐.”

“줄 넘어갈 때 준비할 것. 앞음 짧게 끊기. 그렇다고 힘주라는 것 X”

“4분 음표로 카운트, 2분 음표 급브레이크 밟듯 뚝 끊지 말기.”

“꾸밈음은 ‘앗 뜨거’하는 느낌으로 재빨리.”

“5,6 마디 [라# 솔 솔 솔]. 마지막 솔에서 멈추되, 마지막음 집어던지지 말고 끝까지 소리 내기”

이런 구체적인 기술적인 면은 물론, 표현 면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까지도 받아 적는다.

예를 들면,

“뒤에 쉼표가 따라 나오는 4분 음표는 파인 다이닝의 음식처럼, 그냥 툭 나오는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것을 내어놓는 느낌, 대접하는 느낌처럼 정성껏”

“2분 음표는 가만히, 똑같이 밀기. 물 한 방울을 또옥~ 떨어뜨리는 느낌으로”

“곡 진행에서 누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면 X, 여유 잡고 왼손에 힘 빼고

“유럽 영화에 나오는 신사나 집사처럼 젠틀하고 Kindly 하게” (내 연주가 너무 무뚝뚝하다는 말씀 끝에 하신 얘기.)

“음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복잡하게 많은 음계가 나온 부분들을 내가 뭉개면서 얼렁뚱땅 지나간다는 말씀을 하시며)

“시프팅(shifting:같은 줄에서 손가락 이동)할 때는 줄을 타고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지기)

“왼손 누를 때 촉감은, 폭신폭신 보들보들 느끼면서 활 그을 때도 가장 예쁜 소리가 날 때 느낌을 알아야 함.”

“피자 한 조각 들어올릴 때 치즈가 늘어나듯 이어가기. 뚝뚝 끊지 말기.”

“왼손 움직임: 좀 더 유기적으로. 최소한의 움직임. 놀라서 펄떡거리지 말고 차분히 누르면서 다음 누를 것 미리 생각하기. 움직임은 크지 않게.”


이렇게 열심히 받아 적은 것이 연습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물론 음악을 글로 표현한 것이고, 그 글을 내가 다시 음악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음악은 설명서를 읽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연습을 시작하기에 앞서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쭈욱 한 번 읽으면 내가 오늘 연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중점을 두어야 할 것 이 무엇인지 정리가 한 번 되고 방향성이 생긴다. (방향을 가끔 잘못 해석하는 게 문제긴 하지만). 지금까지 해본 결과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잘 안 되는 부분만 선생님께 연주를 부탁해서 그것을 여러 차례 들으며 똑같이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부분을 다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고, 나는 계속 열심히 필기를 해나간다.

기억력이 왕성한 젊은 시절이었다면 이런 행동을 좀 우습게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적다가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칠 수도 있고, 저렇게 적어놓기만 하고 보지도 않을 거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처음에는 물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 탓에 시작한 것이지만, 열심히 적어둔 것들은 다 나의 자산이 되고, 내 발전의 기록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참 지난 뒤에 다시 펼쳐보면 은근히 재미있기도 하다.

‘정말 별걸 다 적었네’ 하면서.


살면서 왕족 근처엔 가보지도 못 했는데 요즘은 나름 (자칭) 왕족이 된 기분이다.

'나는 필기의 여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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