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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May 30. 2023

책 800권 읽고 쓰는 소감

나의 철없는 독서 여행기

사실 800권은 넘긴 상태입니다. 원래는 1000권이 되었을 때 소감을 써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밀려드는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천 권이 되었을 때 느끼는 바가 있으면 또 쓰면 된다고 생각되어 노트북을 열어 봅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은 지는 거의 15년이 되었고 한해 거의 40~60권씩 읽었습니다. 나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검색해보면 1년에 100~200권 읽는 사람도 있고, 1만 권이 넘게 읽은 괴수도 있어서 자랑하고 다닐 정도는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1년에 책 1권도 안 읽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나는 판국에 나 정도면 상위권이 아닐까 감히 생각하네요. 그러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변화는 무엇일까요?


스마트폰의 성공 사례


100~200권 정도 읽었을 시점

이때 처음으로 느꼈던 변화는 '내 관점'이 생긴 점입니다. 어떤 뉴스, 현상, 사물, 주장들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관점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이게 제가 노력을 투입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거의 자동적으로 제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이나 주장에 연결 지어 생각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어요. 왜냐하면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쳤거든요. 마치 초능력처럼요ㅋㅋ.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머릿속 어딘가에 생각의 힘줄이나 신경망이 새로 생겼던 듯합니다. 참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말해주는 건, 처음에는 너의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보다는 너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냐는 점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공교육의 목표는 이런 사고의 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0대 때야 이런 경험을 했지만,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난다면 10대 때부터도 가능하다고 여겨지거든요. 그러면 단순 하나의 답을 찾아 경쟁하는 구도보다 좀 더 다양한 질문과 답들이 만발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300~400권 정도 읽었을 시점

저는 참 운이 좋았습니다. 막 독서를 시작할 때 토마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읽었는데 우연히도 그 다음 책이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첫 챕터의 제목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다시 읽기'입니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주장했던 세계화 혹은 자유무역/금융 자유화에 대해 첫 장부터 강하게 반박을 시작하죠. 딱히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보기 위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고른 것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책들을 연속으로 읽은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훨씬 재밌었습니다. (게다가 장하준 교수님은 글을 잘 씁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서로 반대되는 지식, 주장을 읽어보는 건 앎과 생각의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는 그 순간의 중요성을 잘 포착하진 못하고 그냥 '이런 반대 의견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그러다가 300권 정도 읽은 시점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만났습니다. 조너선 교수는 정치를 두고 보수와 진보가 왜 충돌하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래서 신성함, 권위에 대한 존중, 평등의식 등 가치 체계를 분류하여 보수와 진보는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는지를 살펴보고 상생할 길을 모색합니다. 책의 주장이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더 흥미로웠던 건 저자 자신도 연구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걸 보인 점입니다. 원래 저자는 중도진보 정도의 정치적 스탠스를 지니었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자신도 인격적으로 성숙해짐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워낙 감명 깊게 읽었던 탓인지 그때부터 저도 가능한 상반된 시각의 책들을 함께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미래에 비관적인 시각을 읽었다면 긍정적인 시각도 읽어보고, 진보의 담론을 읽었다면 보수의 담론도 살펴봤습니다. 이를 통해 얻었던 건 폭넓은 시각과 균형 잡힌 의견들을 가질 수 있었던 점입니다. 또 한 저와 반대되는 의견이 어디엔가 있을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이 점이 요즘 특히 중요한 이유는 세상이 워낙 극단적으로 치우쳐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커뮤니티나 SNS, 뉴스 댓글들을 보면 서로를 혐오하거나 자기들끼리만 모이려는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웹사이트의 주된 의견에 물들기도 쉽고요. 저의 책 읽기가 이런 걸 염두하고 해왔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시대에 저만의 닻을 가진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500~700권 정도 읽었을 시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ㅎㅎ. 좋은 책들을 만난 것도 그렇지만 훌륭한 독서 구루를 만난 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초반에 만났던 구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씨입니다. '시골 의사의 부자경제학'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재테크 내용 자체보다 해박한 지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의사 양반이 자기 분야 외에 이렇게 폭넓게 알까?'라고 계속 의문을 품으며 읽다가 책 뒤편의 에필로그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읽었던 인문학 책들을 통해 어떻게 지혜를 얻었나 간단하게 썼는데, 저는 책 전체에서 그 20~30페이지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거기서 언급된 책들을 대부분 다 읽었습니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장자', '주역' 같은 대부분 철학/인문학책들이었는데 제 20대 초반을 풍요롭게 해 준 선물들이었고 지금도 그 책들을 좋아합니다. '도덕경'은 거의 5번 읽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힐쉬베르거의 '서양 철학사'는 비싸고 무거워서 읽지 못했네요.)

그리고 홀로 독서 여행을 하다가 만난 사람이 홍춘욱씨입니다ㅎㅎ 이 분은 유명해서 모두 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전 이 분의 재테크 책도 좋긴 하지만 세계사 추천 책들 때문에 매우 좋았습니다.

https://blog.naver.com/hong8706/40191617141

그전까진 심리학이나 정치/사회 책들만 주야장천 읽다가 마치 갈 곳 잃은 것처럼 방황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이 분의 책 추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블로그 글을 읽고 바로 '왜 유럽인가'를 읽었습니다. ('총, 균, 쇠'는 이미 읽었거든요.) 너무 재밌었습니다. 저는 항상 '우리가 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를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홍춘욱씨가 소개한 책들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인 산업혁명과 그 전/후 세계사에 대 책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책들 모두 같은 이론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이론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더 재밌었습니다. 덕분에 여러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요. 이 책들과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책(예를 들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들을 읽은 효과 때문일까요. 제 머릿속에 세계에 대한 큰 퍼즐 조각 하나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그 퍼즐조각이 잘 못 됐을 수는 있지만 앞으로 꾸준히 읽으면서 보완해 가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 시점

지금 시점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그저 거인들의 발자국을 추적해 가며 하루하루 읽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거인의 발자국을 추적해 가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거든요. 스티븐 핑커, 제레드 다이아몬드, 매트 리들리, 프란스 드 발, 조지프 헨릭 등등 이들과 동시대에 살고 그 저작들을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더 많은 훌륭한 저자들과 책들이 저와 우리 시대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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