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개성공단 캠퍼스의 리 대리 -18-
"미국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고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이내에게 미국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평생에 걸쳐 미제국은 악마라고 교육받았다. 조국과 인민의 원수, 일본에 이어 한반도를 수탈하려는 존재. 동시에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라는 점도 여기저기서 들었다. 뉴스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그래서 마약과 총기 범죄가 들끓는 국가라고 묘사되지만, 암시장에 가서 조금만 얘기 나눠도 중국보다 10배는 더 강하고 기술이 발달한 나라이고, 그래서 중국마저 수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하지만 악마의 나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선망하는 것조차 아내에겐 죄책감이 들었다. 근데 그런 미국에 조국의 자녀를 보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아영 엄마는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이건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일이니까요. (언젠가는 모든 인민이 알겠지만.) 미국과 수교 물꼬를 트었을 때 고위 간부들은 재빨리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냈어요.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중앙에선 통제를 시작했지만 이미 보낼 대로 보냈고, 아직도 조금씩 가고는 있어요. 우리 동수도 그 대열에 참여했으면 좋겠지만, 남편의 의지도, 능력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나요. 이렇게 개성으로 밀려난 이상 남한 대학을 노릴 수밖에요."
"얼핏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가는 길이 뚫렸다고 들었지만 그게 자녀 진학에 관한 얘기일 줄은 몰랐네요. 여행은 몰라도 유학이라니, 뭔가... 조국과 당에 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거짓말을 했다. 감시의 대상이 되고 누가 될 수는 있어도 딸을 미국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동수 엄마 앞에서 그런 심정을 모두 터놓을 수는 없었다. 그냥 얘기를 더 듣고 싶을 뿐이다. 동수 엄마는 아내의 지나친 조바심을 이미 읽었다는 듯이 살며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당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수교에 미국 유학이 포함된다고 발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뉴스만 보지 말고 그 속뜻을 봐야 해요. 정보통이 있으면 더 좋고요."
"정보요...?" 아내가 항상 굶주린 것이다. 그게 없어서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다니고 있지 않나. 동수 엄마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아영이가 공부를 매우 잘하지만, 그것만 해서는 좋은 대학, 특히 남한 대학에는 보낼 수 없을 거예요. 당에서 항상 남한 뉴스 통제에 곤두서 있는데 교육 정책이야 더 말할 게 있나요. 여기서는 남한 입시 정보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어요. 하지만 남한 엄마들과 교류를 계속하거나 제 정보통에게 얻어서 아영 엄마에게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너무 뜻밖의 선의라 아내는 또다시 당혹스러웠다. 오늘 돌아가는 길조차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여사님, 정말 감사하긴 한데 저희가 특별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답례를 해드려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동수 공부 좀 도와주세요." 동수 엄마에게서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아내가 놀랐다.
"동수 성적 좀 아영이를 통해서 좀 올려주세요. 엄마로서 동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지만, 동수 녀석 성적이 걱정이에요. 지금 상황으로는 다른 건 다 충족해도 성적이 안되니 그 부분만 아영 엄마에게 부탁하고 싶네요. 남한 아이들과 같이 과외를 받을 순 있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 먼저 올려야 하는데 남한 애들이 좀 이기적이어야 말이죠. 같이 가르쳐 주고 도와주면 좋을 텐데 그러질 않아서요. 아영이에게 동수 과외 좀 부탁하고 싶네요. 그리고 그때 모임에서 말한 인터넷 강의 좀 줄 수 있을까요?"
아내는 생각에 잠시 잠겼다. 결코 나쁜 제안이 아니다. '엄마 마음은 어디서나 같은 거 아닐까' 아내는 확신이 들었다. "아영이에게 말해 볼게요. 인터넷 강의라면 사실 남한에서 구해온 거라 마음이 걸리네요."
"걱정 마세요. 요새 남한에서 건너온 매체에 대한 감시가 심하긴 한데, 특히 동수 아빠 같이 간부와 가족에게만 심할 뿐이에요. 아영 엄마에겐 절대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네. 나중에 USB로 드리도록 할게요." 아내는 말하면서 잔을 비웠다.
"고마워요. 사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불렀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네요." 동수 엄마는 긴장이 풀린 듯 말했다.
"아니에요. 덕분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해준 말도 없는데요. 앞으로 아영 엄마한테 신세 좀 질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미리 고마워요."
동수 엄마는 말하면서 일어섰다. 얼마 안 있으면 남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라 가봐야 했다. 아내는 떠나기 전 동수네 실내 전경을 다시 한번 쓱 살펴본다. 살짝 붉어진 태양빛이 아직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 초대받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얼마 안 있으면 회사 반기 평가가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현관문을 나설 때 동수 엄마가 말했다.
"네." 아내는 살짝 긴장했다.
"아영 아빠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영이도, 아영 아빠도 올해 좋은 일이 많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내는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