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이나 한국전쟁이 냉전 시대의 상징이라면, 컨테이너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사업적 가치를 알아본 말콤 맥린에 의해 컨테이너 운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처음엔 15피트 내외로 시작했던 컨테이너 크기는 오늘날 40피트에서 53피트까지 커졌다. 그 과정에서 정부, 노동자, 지역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컨테이너화는 항구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런던의 오래된 주요 항구들은 몰락했지만, 이를 빠르게 도입한 싱가포르와 부산항은 큰 혜택을 봤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선박과 세계 경제의 변화는 금융위기 때 한진해운이 왜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 준다.
책을 읽다 보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하게 된다. 비용을 절감하려는 선사들과 더 많은 화물을 실으려는 해운 산업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바다 위 무역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육상 운송 비용 절감에도 큰 영향을 줬다. 이런 비용 절감 효과 덕분에 도요타의 적시생산방식(JIT)이나 중국의 아이폰 제조 같은 아웃소싱 모델이 가능해진 셈이다.
항만에서 바다 사나이들의 로망과 끈끈한 동료애는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는 철제 컨테이너와 거대한 크레인이 채우고 있다. 해운 산업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더 큰 배와 더 큰 항구가 등장하고, 항구에 근접한 도시들은 다시 한 번 운명이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만약 유라시아 횡단 열차가 한반도까지 연결되고, 기차 운송이 선박보다 저렴해진다면 부산항은 쇠퇴하게 될까? 아니면 더 성장할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래도 '더 박스'에서 얻은 지식 덕분에 앞으로 무역과 세계 경제의 흐름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추천. 금융위기 이후 가라앉은 국내 조선업의 민낯이 궁금하다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추천한다. 저자가 울산에서 일하며 지켜본 산업의 발전과 쇠퇴, 그리고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이 잘 담겨 있다.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잘 짚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