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내가 우리본성의선한천사 를 읽으며 요악한 것 중 일부이다. (그 땐 도전정신으로 두 번 읽고 요약했는데 지금보니 참 잘 했다는 생각이든다.) 45년 이후 (냉전 당사자가 관여하는) 전쟁은 0 이라고 했는데 나온 지 10년 만에 깨지다니 요즘들어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요약글을 읽었다.
1) 세월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어떤 생각/시대의 완성, 불변의 추세 발견, 장기적인 낙관적/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을 때가 바로 그것의 정점이거나 변곡점에 도달한 경우가 많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출간된 지 9년 후 9.11 테러가 발생했고, 이 책이 나온지 10년 후 러-우 전쟁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동시에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정리하기 전까지는 계속 추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니 미래를 예측하긴 참 어려운 듯하다. 몃 달전에 발견 한 책 제목이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는데 자못 섬뜩하다ㅎㅎ
2) 푸틴의 러시아, 미국의 트럼프, 그리고 유럽국가의 극우정당 득세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민주주의 정치/UN가입/자유무역을 한다고 평화가 실현된다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와 많이 접촉을 한다고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민족이라는 유령은 아직도 살아있으며, 소외된 자들, 엘리트들이 뭉치게 되면 얼마나 상황이 쉽게 변하는지 요새 많이 느낀다. 앞으로 이와 관계된 책도 꽤 읽어 볼 생각인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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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에서 본능의 존재를 옹호했던 학자가 시선을 돌려 폭력의 감소를 환경적 요인에서 적극 찾은 것이 인상적이다. 환경론자 혹은 사회학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료가 사실을 말해 준다면 환경적 요인도 언제든지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울만하다. (물론 본능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는다. 폭력의 감소를 환경에서'만' 찾을 뿐이다.)
보통의 인간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 때론 선하다고 믿는 면도 도덕적 관계 모형처럼 악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선함이 계속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을 때였다.
스티븐 핑커는 악마와 천사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어울리고 다투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천사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지 잘 보여줬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한 조각이 완성된 느낌이다. 물론 저자가 호사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반박도 역시 저자만큼의 자료 수집과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 역사 속 폭력의 흐름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시대는 사실 낭만적 시대가 아니었다. 유혈이 낭자한 끔찍한 시대다. 호메로스뿐이랴. 성경 속 야훼는 직접 물리적 처벌을 집행하는 대목이 1000 군데쯤 있고, 살인 명령은 100 번 정도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약 1200만 명이 성경 속에서 살육 당한다. 다행히 모두 사실은 아니다. 노아의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고 전세계 사람들은 수장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를 보여주기엔 충분하다. 기원후 기독교는 신성을 위해서 고문을 찬성했고, 유럽의 기사도는 재미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 말로 사람을 짓밟았다. 겁탈은 예사다. 미국은 어떤가? 서부 영화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비공식적인 결투를 명예와 결부시켰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 시절, 자기 딸을 비판한 사람에게 코를 박살 내겠다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명예로운 전쟁과 결투를 마음 속으로 숭상하지 않는다. 극적인 폭력은 드라마나 영화 속 소재거리다. 한국에선 드라마 속 칼마저도 모자이크 처리해 버린다. (담배는 이해가 안 간다..)
1. 홉스적 선사 시대 그리고 평화화 과정
수렵 채집인 사람들은 안전, 이득, 평판 같은 원초적 원인 때문에 싸웠다. 그때 인구를 생각했을 때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그 타격은 그 시대에 매우 큰 것이다. 마을 간 전투가 일어날 땐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패배자의 살갗을 조개껍데기로 벗기거나 살점을 떼어 보는 앞에서 구워 먹기도 한다. 수렵 채집 집단은 2년마다 70% 확률로 전쟁했으며, 90퍼센트 확률로 매 세대 전쟁을 겪었다.
최초의 폭력 감소는 국가의 출현이다. 맨 처음 이들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사람들 삥을 뜯는 무장단체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속적인 갈취를 위해서라도 내부적 갈등은 관리해야 했다. 최초의 리바이어던 출현이었다. 국가 이전과 발생 이후를 비교하면 국가 이전 평균에 비해 3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한다. 물론 국가에 속하는 대가로 인간은 전염병과 싸워야 하고, 권력자의 갈취에 순응해야 했다. 하지만 살해 당할 가능성이 5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진다면 감수할 만하다.
2. 터부의 발달 그리고 문명화 과정
1300년에서 1900년 사이 유럽에선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살인율이 10분의 1에서 50분의 1 사이로 대폭 감소한다. 중세 유럽에선 신체 절단이 아주 흔했다. 당시 의학계에선 코가 다시 자라날지 아닐지 분분했다. 홧김에 상대의 코를 베는 폭력이 너무 흔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웃고 떠들다가도 칼을 들었다. 자신의 감정에 여과 없이 분출했다. 변화는 예절에서 단서가 시작된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 책에서 에티켓에 관해 기록했다. '식탁보로 코를 풀지 않기, 계단, 복도에 소변 보지 않고, 소스 그릇에 손가락 담지 않기, 손을 씻으면서 대야에 침 뱉지 않기' 오늘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역겨운 행동들을 중세 사람들은 하곤 했다. 칼에 관한 에티켓도 있다. '칼로 이빨을 쑤시지 마라, 칼로 음식을 입에 넣지 마라. 칼로 남을 겨누지 마라' 이는 유럽인들이 점차 충동을 억제하는 쪽으로 변해갔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절은 그들이 충동을 억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지침이었다. 귀족 계급은 평판을 고려해 품위의 문화를 발달시켰고 이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러한 자기 통제는 발끈해서 상대를 죽이는 폭력에마저 영향을 주었다. 자기 통제력은 심리적 근육이다. 다른 설명도 있다. 리바이어던이 탄생하자 귀족들은 왕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감정이입과 비위 맞추기를 위한 예절의 탄생이다. 상업의 발달 역시 예절에 영향을 주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거래의 상대로 보는 순간,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살인보다 예절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자 인간은 행태를 바꾸었다. 리바이어던과 상업은 인간에게 자기 통제와 예절을 가르쳤고 문명화는 폭력을 감소시켰다. 또 하나 문명화 요인은 여성이었다. 옛날 미국 남부와 서부는 국가의 통제, 즉 리바이어던이 없었다. 서부의 사나이들은 걸핏하면 총을 쐈고, 진저리가 난 상인들과 공무원은 여성의 이주를 장려했다. 결혼의 우위를 이용한 여성들은 도박장보단 학교와 교회를 세우길 원했다. 술집과 사창가가 닫고, 제도에 여성의 소원을 반영하자 사내 간의 폭력은 감소했다.
3. 계몽주의 그리고 인도주의 혁명
교리, 관습에 의한 폭력 역시 종말을 고했다. 마녀재판과 인간 제물은 한 예다.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 어떤 목적을 추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해악의 두 사례이다. 증명 불가능한 신념의 큰 위험은, 폭력적 수단으로 그것을 변호하려는 유혹이 든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17세기 후반, 베스트 팔렌 조약이나 명예혁명 등을 겪으면서 점차 감소했다. 이성과 회의주의가 득세하며 인간은 영혼보다 생명에 가치를 두는 기미를 보였다. 18세기는 서구의 제도적 잔인함에서 전환점이었다. 잔인함을 야만과 점점 동일시하고, 범죄 처벌에서도 고문을 멸시하며 폐지를 외쳤다. 사형제와 노예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성과 계몽주의는 전제 정치와 정치적 폭력도 끝장냈다. 솔로몬 왕은 아기를 둘로 쪼개려 했고, 중세 유럽은 왕들이 계속해서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 백성들에 대한 대량 폭력도 자행됐다. 그래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여러 가지 사고 실험을 했다. 정부는 신에게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통치 장치이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분리한다. 선거를 주기적으로 치른다. 이 같은 주장은 초반에는 약했지만 민주주의 장치로 점차 개량해 나갔다. 전쟁의 정당성도 약화시켰다. 적을 쳐 빛을 밝힌다는 도덕적 정당화는 풍자에 무너져 전쟁에 대한 지지를 잃었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이론과 주장도 득세했다. 대표적으로 무역의 이점이다. 상업의 플러스 이득이 전쟁의 제로섬 게임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도 주목할 만하다. 영구평화의 예비단계는 국가 간 간섭, 전쟁 자금 차입을 하지 말고, 조약에 전쟁 선택지를 아예 없애라는 것이다. 그다음 영구 평화의 조건을 제시했다. 민주주의 국가일 것, 자유 국가들의 연방에 기초할 것, 세계 시민권이다. 두 번째 조건은 UN과 맞닿고 후에 긴 평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인도주의 혁명은 그것이 명문화되기 전부터 사람들 행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사람들은 폭력 사용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감수성이 명문화가 되고 이는 다시 사람들 행동을 변화 시키는 선순환을 가져왔다. 감정과 행위 변화에 영향을 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앞의 문명화 과정이다. 일례로 청결에 대한 요구는 도덕적 직관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불결한 자 =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 청결한 자 =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라는 직관들이 문명화 과정에 형성됐다. 자기 충동 억제(깔끔함)는 그 사람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조심하고, 폭력을 잘 억누르는지 좋은 지표였다. 하지만 문명화로는 불충분하다. 다른 가설은 삶이 풍족해졌을 때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잘 발휘한다는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여유가 있다. 윤택한 삶을 만든 후보로는 산업혁명이 있고, 그 이전에는 인쇄 기술 발달이 있다. 구텐베르크에서 시작한 인쇄 기술 발달은 책 가격을 대폭 감소시켰다. 곧이어 서민들도 책으로 공부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로 유럽권의 식자율은 거침없이 올라간다. 인도주의 혁명의 가장 큰 공로자는 쓰기와 읽기 능력의 성장이다. 과거 주변 사람들만 이해하던 인간의 공감 범위는 이제 무한으로 뻗쳤다. 출판술의 발전 -> 책의 대량 생산 -> 문해 능력의 확산 -> 소설의 인기 -> 인도주의 혁명은 인과관계로 설명 가능하다.
4. 강대국들의 긴 평화
20세기가 가장 폭력적인 세기일까? 아래 통계를 보자.
20세기 후반부는 강대국들이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오랫동안 전쟁을 피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대살상은 20세기 전에 일어났다. 몽골의 첫 지도자 칭기즈 칸은 인생의 쾌락을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쓸어 내는 것이다.' 리처드슨의 연구에서는 두 가지 광범위한 결론에 도달한다.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라는 것과 전쟁의 규모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는 것이다. (규모가 클수록 발생빈도는 줄어든다.) 규모가 큰 전쟁의 발생과 시기는 상관관계가 나오지 않는다. 큰 흐름은 보인다. 강대국과의 전쟁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미 - 중 전쟁이 마지막이다.) 강대국들이 관여한 전쟁 횟수도 줄고, 지속기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무기 발달로 치명도는 증가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근대 유럽은 작지만 잦은 전쟁들이 상존하는 홉스적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츰 정치 단위들이 통합되어 더 큰 국가를 이루자, 전쟁 횟수는 줄었다. 동시에 일단 벌어진 전쟁은 (군사 혁명 때문에) 더 치명적이었다 전쟁을 만든 요인이 새로 생기기도 했다. 종교의 광풍이 지나고, 몇 백 년 지나자 민족주의가 기치를 올렸다. 이후 유럽은 낭만적 민족주의(세계 대전에 영향 주었다),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버크식 보수주의가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며 유럽 판세를 정했다.
1945년 이후 전쟁은 '0'의 통계학을 보여준다. 0은 : 핵무기가 사용된 횟수, 냉전의 주인공들이 충돌한 횟수(대리전 제외), 53년 이래 강대국들이 싸운 횟수, 서유럽 국가들이 싸운 횟수(1400년부터 연간 2회 싸웠음), 주요 선진국들이 싸운 횟수, 영토를 확장한 횟수, 정복을 당해 존재가 지워진 나라의 수이다. 가장 강한 미국조차도 베트남 전쟁 이후 일체의 군사적 행동을 꺼린다는 평을 들었다. 군사 지도자들은 불필요한 살해는 오히려 국내에 반발을 일으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왜 긴 평화가 오게 됐나? 핵 때문에는 아니다. 대량 살상 무기가 전쟁에 제동을 건 적은 없다. 재래식 무기로도 충분한 살상이 가능하다는 걸 지난 세계대전은 보여줬다. 핵이 없는 나라가 전쟁을 삼가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핵에 대한 터부는 화학 무기에 대한 터부와 비슷하다. 둘 다 고통스럽게 죽이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어 보유국마저도 쓰기를 꺼려한다. 민주주의는 긴 평화에 영향을 끼쳤다. 다른 조건들이 같을 때, 민주 국가들끼리는 분쟁 가능성은 절반 이상 줄었다. (상업의 원리를 포함하는)자유주의도 영향을 끼쳤다. 역사에는 자유로운 무역과 큰 평화가 상관관계를 보인 사례가 많다. 또 한 세계 경제에 개방된 나라일수록 군사 분쟁에 참여할 가능성이 낮았다. 결국 칸트의 평화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됐다. 평화는 민주주의와 무역을 좋아하고 UN 같은 국제기구 가입을 권한다.
인간이 자동적으로 평화를 향해 승리해 가진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감정, 규범, 터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적 직관에 따른다. 그리고 어떤 역사적 순간에 지도자들과 그 연합체들의 그것이 맞아 평화로운 공존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20세기는 세계화, 지구촌 시대였다. 각국의 사람들은 국경에 막히지 않고 다닐 수 있는데 이는 타국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립에서 나오자 우리가 축적했던 문명화, 인도주의 혁명들은 여기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마지막 최후의 전쟁까지 없앤다, 새로운 평화
여기서는 강대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전쟁, 인종이나 정치 집단에 대한 조직적 폭력, 테러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모든 종류의 살해들이 감소세이다. 내전의 감소에도 민주주의와 무역, 해외 투자, 전자 매체 접근성이 영향을 끼친다. 다만 내전이 발생하는 국가에선 민주주의가 완벽하지 못해 완전 제 기능을 발휘하진 못한다. 종교나 민족은 이유가 되지 않고, 인구 수, 산악지형, 불안정한 정부, 산유국, 젊은 남성 비율이 내전 발생률에 영향을 끼친다. 국제 평화 유지군은 내전 감소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평화 유지군의 존재는 전쟁이 재발할 위험을 80퍼센트나 낮췄다. 평화 유지군은 리바이어던 역할을 한다. 먼저 전쟁을 시작한 쪽을 리바이어던은 벌해 막는다.
집단살해는 인간의 가진 특이성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본질주의적 습관이 있어, 사람들을 범주로 나눠 뭉뚱그린다. 그리고 그 범주 전체에 도덕적 훼손을 가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그 힘을 증폭해 수백만 명을 죽인다. 사람을 도덕화된 범주에 가두는 유토피아적 신념이 강력한 체제에 뿌리내리면, 그야말로 최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국가에 의한 살해는 전체주의 정부들이 저지른 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참고로 일본제국은 600만 명) 집단 살해의 원인으로는 과거의 집단 살해 역사, 근래 정치적 불안정성, 통치 엘리트가 소수 민족 집단에서 나올 때, 민주주의, 무역에 대한 개방성, 배타적 이데올로기의 유무이다. 이러한 집단 살해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 때문에 제도적으로, 대중적으로 집단살해를 범죄로 못 박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집단 살해 방지에도 제 역할을 한다. 전체주의 정부와 반대다.
테러는 20세기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 방식일까? 사실 테러 단체는 대부분 실패하고 모두 사라진다. 28개 주요 테러 단체의 성공률은 42건 중 2건, 즉 5퍼센트도 못 된다. 반면 경제 제재의 성공률은 약 3분의 1은 된다. 테러리스트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했다. 94퍼센트는 그 어떤 전략적 목표도 성취하지 못했다. 지도자가 살해되거나, 국가에 소탕되서 정치 지형이 변해서, 후임을 못 찾는 등 소멸하는 단체가 많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의 반감을 살 경우, 그들은 쉽게 고발하고 은닉처를 제공하지 않았다. 테러로 인한 사망률 그래프는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 테러리스트에게 핵무기가 넘어갈 가능성은? 사실 재료가 있어도 만들기가 힘들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정밀 공학 및 제조 기술이 필요하고, 잘 못 관리하면 고철 덩어리가 되기 쉽다. 만드는 과정에 많은 전문가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 발각, 배신, 함정 수사, 실수, 불운이 지뢰처럼 깔려있다. 전문가의 계산에 의하면 심하게 잡으면 100만 분의 1이다. 그리고 차라리 핵테러에 쓸 예산이라면 다른 테러 계획이 낫다고 한다.
6. 마지막 소수까지 구한다, 권리 혁명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의 상승. 이 부분 요약은 그래프로 대신한다. 우리 주변에 있어 실제 느껴지는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권리 혁명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생적 원인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사상과 사람의 이동성을 높인 기술들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케이블 방송, 위성, 복사기, 인터넷, 고속 열차, 제트 비행기. 이것들은 무지와 미신을 타파한다. 대중이 교육을 받고 서로 연결되면, 적어도 집단 차원에서 장기적으로는 유해한 신념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마련이다. 인도주의 혁명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 우리 본성의 천사와 악마
7. 역사에서 심리로, 악마를 분해해 보자
우리 모두 한 번씩 살인해 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상상과 실제 현실에는 크게 괴리가 있다. 왜 그럴까? 인간은 폭력이 일어날 때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한다. 당연히 상대도 생존본능을 발휘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다윈주의적인 억제책이 우리네 심리에 자리 잡고 있다.
바우마이스터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도덕화 간극이 있다고 설명했다. 저마다 자기 편향의 설명을 늘어놓는 점이 있다. 여기서 3자와 피해자는 피해 입장에서 가해자를 무조건 악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를 순수한 악의 신화라고 부른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해석은 상당히 불순하고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신화는 진정한 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좌절시킨다. 악을 이해하는 노력이 가해자의 관점을 취할 순 있지만 무조건 옹호하는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래야 악마를 분석할 수 있다.
악마의 5가지 성질은 포식적 폭력, 우세 충동, 복수심, 가학성(남을 해침으로써 얻는 즐거움), 이데올로기이다. 포식성은 사실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가해자에게 미움이나 분노 따위의 파괴적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그저 바라는 것을 얻고자 최단 경로를 택했는데, 하필 살아있는 물체가 그 길을 막고 있었을 뿐이다. 포식성은 착취적, 도구적, 실용적 폭력이라 불러도 좋다. 포식적 폭력은 그저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의 개수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간단한 예로 사냥이다. 포식적 폭력은 두 요소로 구분된다. 인간이 수단과 목적을 추론할 줄 안다는 점, 그리고 도덕적 구속 능력이 일상에서 매번 자동적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반전이 더 있다. 포식적 폭력의 상황이 바뀌면 다른 종류의 폭력, 즉 감정이 팽배한 폭력으로 바뀌려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저항할 때 수단의 폭력이 혐오, 증오, 분노의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또 한 인간은 자기 확신 성향 때문에 의심 없이 승리를 확신한다. 이런 착각은 서로에게 처음부터 큰 폭력성을 보이게 하고, 건조할 수 있었던 갈등은 감정이 격화된 전쟁으로 변한다.
우세 경쟁은 공격받기 전 자신의 힘을 최대한 과시해 침탈을 막기 위한 전략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핵심은 정보다. 막상막하인 게 판명된다면 우세 행동은 과시적 행위로 끝난다. 때문에 우세 경쟁의 폭력은 고립된 집단에서 일어나기 쉽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갱단에서 서로에 대한 탐색이 힘들 때 충돌은 점화한다. 우세 경쟁은 남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사회적 지위에 압도적으로 큰 가치를 부여하는 수컷 포유류들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섹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용한 폭력은 잃는 것보단 얻는 것이 많았다. 우리는 충성하는 집단이 경쟁을 벌일 때, 타고난 우세 경쟁 충동을 대리 체험한다. 집단 감정의 어두운 면은, 우리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우세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눈다. 민족주의를 보면, 민족주의가 나르시시즘과 결합할 때 우세의 감정(분노와 굴욕, 시기)의 포로가 되기 쉽다고 한다. 이런 민족 집단들이 유혈 사태를 피하는 건, 원인을 제공한 문제의 인물을 어떻게 처벌하냐에 달려있다. 그러면 상대방은 단순 개인 간 문제로 치부하고 충돌을 피한다. 또 한 오늘날 국가는 자신을 단일 민족국가로 정의하길 피한다. 여성이 권력을 잡으면 전쟁이 사라질까? 엘리자베스 1세, 예카테리나 2세, 메리 여왕은 정복지를 만들고 남자들을 전쟁터로 충분히 많이 보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여성은 평화의 편이 많았다. 노예제 폐지, 동물권, 베트남 전쟁, 핵 실험 등 여성은 폭력 투쟁에 활발히 항의했다. 여러 민족지학 조사를 보면, 여성을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전쟁을 덜 벌인다. 같은 조건이라면 여성의 영향력이 큰 세상일수록 전쟁이 적을 것이다.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우세 경쟁과 그에 관련된 남자다움, 명예, 위신, 영광 등등의 덕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세의 아우라가 빛이 바랜다.
복수의 충동은 폭력의 중요한 원인이다. 전 세계 살인의 10~20 퍼센트는 복수가 동기이고, 대상이 집단일 때는 도시 폭동, 테러, 테러에 대한 보복, 전쟁의 동기기 된다. 복수는 다혈질만 저지르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뇌에서 쉽게 눌러지는 단추이다. 이런 복수에는 상대를 억제하는 나름의 기능이 있긴 하다. 자신을 희생하며까지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는 건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다. 상대를 배신할지, 협력할지 결정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배신자에게는 관용 없이 보복을 가하는 전략은 전체 연속적인 게임에서 높은 승률을 보였다. 그렇다면 현실에선 보복이 억제 기능을 왜 제대로 하지 못할까? 주된 이유는 도덕화 간극이다. 자신만의 사정을 헤아리고 상대의 사정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다. 정보의 부재가 다시 원인이다. 그렇다면 악의 순환고리를 어떻게 끊을까? 리바이어던이 복수의 순환을 끊기도 한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 상황에서 자신이 보복을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법이 자신에게 약해 보이지도 않는 효과를 줄 수도 있다. 법체계가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자기 억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너무 가까울 때, 가해자가 사실 무해할 때 복수는 조절된다. 화해, 사과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진심이 담긴 화해는 상대를 움직인다. 국가 간 화해의 요소는진실과 피해를 인정하고, 대치 관계를 재정의해 조화의 단서를 찾는다. 제일 중요한 요소는 불완전한 정의이다. 모든 원한에 일일이 따지면 힘들다. 과거에 일정한 선을 긋고 대대적인 포용을 보여줘야 한다. 평화와 정의는 무조건 동치는 아니다.
가학성은 상대가 고통 당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최악의 폭력 형태이다. 가학성은 고통을 즐기는 동기, 그 동기 실천을 막는 제약이 없을 때 나타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서 만족을 느끼는 동기 네 가지가 있다. 생명의 허약함에서, 우세 경쟁에서, 복수를 위해, 성적 만족에서 가학성을 찾는다. 하지만 가학성은 몇 가지 요인 때문에 발휘되기 어렵다. 감정 이입이 가학성을 보통 이기고, 고통을 터부시하고, 우리가 원초적으로 고통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가학성은 후천적인 요인이 있다. 고문 기술자는 신참보다 베테랑들이 더 잘하고 실제 더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어느 임계 범위를 넘어서면 가학성이 자기 통제, 감정 이입을 넘을 정도로 강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폭력 중 가장 파괴적이다. 더 큰 선을 추구한다는 이상 때문에 폭력을 너무나 쉽게 수단화한다.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가 왜 그렇게 병리적으로 전염될 수 있을까? 그중 양극화다. 두 상반되는 입장이 있을 때 이들은 중도에서 더 양극단으로 가 서로를 공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둔감화는 내부의 반대 의견을 차단하고, 집단 간 적개심은 집단 이데올로기를 더 강하게 공유한다. 인간이 간직한 순응과 복종심은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 좋다. 이데올로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살아남기 위해선 거짓으로 믿는 척하고 믿지 않는 자를 고발한다. 마녀재판, 스탈린 독재, 마오의 독재 때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서로를 고발했다. 학살적인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이 따르는 데는 도덕화 간극이 다시 등장한다. 자신의 행동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법이다. 국경 조정(강제 이주), 사소한 소동(학살), 부수적 피해(잔혹한 처벌) 같은 표현이다. 점진주의 방법은 작은 행위에서부터 큰 폭력까지 사람들을 빠지게 한다. 거리두기 방법은 피해자를 익명으로 누군가로 만들어 이데올로기 추종자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이데올로기는 워낙 강력하여 확실한 답은 찾기 힘들다. 열린 사회를 만들어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검증하는 방법 밖에 없다.
8.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여기선 폭력을 줄인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성과 터부, 이성을 다룬다.
감정 이입(empathy)이라는 단어는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되었다. 감정 이입은 자신에게 타인의 마음을 투사하거나, 관점을 취해보고, 마음을 읽어 보려고 노력(theory of mind) 하는 행위들이다. 좀 더 중요한 감정 이입으로 공감(sympathy)를 주목해 볼 수도 있다. 공감을 할수록 죄책감을 더 느끼기 쉽고, 폭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공감의 범위는 가족이나 연인 혹은 그 사람의 생김새(동안일수록 유리)에 따라 한정적이고 무차별로 적용되진 않는다. 공감의 범위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났을 때, 유익한 관계 형성이 가능할 때, 비슷한 가치나 단체를 가지고 있을 때 보인다. 공감을 일으키는 외생적 기제는 소설, 회고록, 자서전 등을 읽으면서 타인의 관점을 취해 보는 것이다. 공감은 진정한 이타성을 촉진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의 경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 현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이다. 하지만 감정 이입에는 어두운 면이 있어 무조건 지지하긴 어렵다. 감정 이입이 더 근본적인 공정성의 원칙과 충돌할 때는 사람들의 안녕을 뒤엎을 수 있다. 텔레비전이나 에세이로 유명해진 병든 소녀를 주목하여, 다른 치료받을 아이가 밀려날 수 있을 수 있다. 체계가 안 잡힌 정부에서 주변 인물들에게만 감정 이입을 한다면 정작 중요한 곳에 세금이 투입되지 못할 수도 있다. 감정 이입의 편협성을 볼 때 역사 속 모든 폭력의 감소를 설명하긴 부족하다.
폭력이 역사상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던 현상, 즉 중세 유럽에서 근대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살인율이 30분의 1로 줄었던 현상은 자기 통제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국가 통합과 상업 성장은 사람들에게 약탈을 꺼릴 유인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통제의 윤리를 주입해, 절제와 예절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쾌락을 위해 현재의 쾌락을 유보할 수 있다. 미래의 쾌락이 지나치게 평가절하할 경우, 우리는 현재에 그 가치를 다 써버린다. 은행 이자율이 대표적이다. 자기 통제는 당연하게도 폭력을 자제하는데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 폭력 외에도 성적, 고른 음식 섭취, 알코올 중독에서도 역할을 보인다.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이 신경질적이고, 속으로 삭이고, 긴장되어 있는 것으로 예상되지만, 연구는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이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 통제가 약한 사람들은 폭력을 더 많이 저지른다. 심리학 상의 자기 통제 개념(당장의 쾌락보다 미래의 쾌락)은 범죄학의 자기 통제 개념(폭력성의 분출)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범죄 발생도가 감소하는 현상은 자기 통제력이 증가하는 현상과 관계가 있다. 뇌의 통제를 담당하는 물리적인 신경 배선이 이십대에 접어들어 완성되기 때문이다. 폭력은 자기 통제뿐만 아니라 자기 통제와 충돌하는 충동과도 관련 있다. 십대 때는 여러 감각적 욕망과 충동을 겪고, 통제와 충동이 서로 싸우다 나중에서야 자기 통제가 승리하는 것이다. 자기 통제는 역사적으로 점점 성장했을까? 인간은 자기 통제를 성찰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을 향상시킬 방법도 고안 해왔다. 물리적으로 거리 두는 방법(마약상이 판치는 도시에서 벗어나기), 문제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재설정 하는 방법(자신에 대한 모욕을 사소한 일로 여기기), 자기 몸 상태를 개선하는 방법이다.(배고프거나 피곤하면 자기 통제가 줄어든다.) 자기 통제는 근육처럼 단련하고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자기 통제를 연쇄 반응처럼 퍼뜨릴 수 있다. 법 집행과 경제 협력 기회는 자기 쾌락(보상)의 구조를 바꾸어 현재의 쾌락을 억제한다. 인과 관계라 단정할 순 없지만, 자기 통제와 미래 지향성 강화라는 더 폭넓은 변화의 일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장기 지향과 절제를 강조하는 국가에서는 살인율이 떨어지는 현상 역시 인과 관계를 보인다.
-> 흥미로운 내용이다. 그렇다면 폭력적 국가나 문화는 자기 통제적 국가나 문화보다 점점 뒤떨어지게 됐을까? 폭력적 국가가 자기 통제적 국가를 공격해 몰아내지 않았을까? 군비 경쟁에 져서 지도상에 사라진 자기 통제적 국가가 있을 순 있다. 하지만 폭력적 국가는 내부에서 지도자 층의 내분이나 권력 투쟁,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한 시스템의 미비로 스스로 망할 수도 있다. 또 한 자기 통제적 국가는 생산성 향상이 군비 경쟁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여, 최종적으로 폭력적 국가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기 통제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되고 강화될 순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 자기 절제력이 있는 성공한 귀족, 자본가가 더 많은 자손을 낳아 후세로 갈수록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들이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 통제가 더 강한 후손들은 세계 대전을 몇 차례 일으켰고, 인종 학살, 이데올로기적 집단 살해의 족적을 남겼다. 동시에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살인율이 극적으로 떨어진 현대의 현상을 설명하진 못한다. 폭력에 있어선 생물학적 진화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도덕이 지나치게 많아 범죄를 일으킨다. 자신의 도덕성은 어떠한 잔학 행위도 용서하며 동기를 제공한다. 도덕 감각은 때로는 질병이지만 때로는 치료약이다. 한편 터부는 사람들의 마음이 전쟁, 화학 무기와 핵무기 사용, 인종의 비인간화, 강간 따위의 위험한 영역으로 미끄러 들어가지 않게 막아 준다. 도덕성은 인간 본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선을 자처하는 미치광이 천사이다. 그렇다면 도덕 감각이 폭력 감소에 일조했을까? 도덕적 신념은 실천되고, 강요되고, 처벌한다. 피스케는 도덕을 관계 맺기 유형에 따른 모형들로 나누었다. 공동체적 공유의 도덕, 권위 서열의 도덕, 동등성(공평함과 상호성)의 도덕, 시장 가격 / 합리적-법적 도덕이다. 사회에서 이들 중 어떤 것도 압도적인 황금률로 다른 도덕을 지배하진 않는다고 본다. 대신에 어떤 특정 행위가 도덕적 관계 맺기 모형을 존중하느냐 침해하느냐에 따라 갈등 구조를 결정한다. 실제로는 하나의 관계에서 다양한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친구끼리 평소엔 호의를 베풀지만, 여행 갈 때 기름값 분배(동등성)나 전문성을 갖춘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명령(권위 서열)을 내릴 수 있다. 관계 맺기 모형을 위반하는 행위는 잘못된 일로 도덕화된다. 기름값을 각자 내기로 하면서(시장 가격의 도덕), 친구라는 이유로(공동체적 공유의 도덕) 갚지 않을 경우이다. 어긋난 관계 맺기에 대한 감정 반응은 그것이 사고냐 고의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모형이 어떤 모형으로 교체되었는지, 자원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문화, 나라마다 이런 도덕적 관계를 맺는 것은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모든 도덕적 관계 맺기 모형은 이중성을 보인다. 공동체적 공유 관계에서는 내집단에서는 따뜻함을 보이지만 거기서 제외될 경우, 상대에 대한 비인간화될 가능성이 있다. 권위 서열 모형에서는 리더가 밑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안으로의 내분을 막는 유인이 있다. 하지만 노예, 식민 통치, 배신자에 대한 사형 선고 같은 행위를 정당화한다. 동등성 모형은 상대가 싫더라도 지속적 관계를 맺는데 도움은 준다. 하지만 그것이 공평함을 위배할 경우, 복수의 순환고리를 만든다. 이러한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덕적 심리는 역사에서 폭력을 감소시켰을까? 그렇다. 지난 300년 동안 우세했던 모형들이 변했다. 공동체적 공유 모형으로부터 권위 서열 모형으로, 동등성 모형으로, 시장 가격 모형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공동체적 공유 모형과 권위 서열 모형은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도덕적 관계 모형의 축소는 폭력의 축소도 같이한다. 의외로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줄어들면, 정당한 처벌 대상이 되는 위반 행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한국에서 불륜 처벌이 더 이상 불법이 아니 듯이). 동성애, 신성 모독, 이단, 상스러움 등을 더 이상 처벌할 구실이 사라지자 국가의 폭력도 자연스레 감소했다. 동성애, 마약, 매춘까지 처벌하지 않을 경우, 도덕적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할지는 모르나 반드시 폭력은 감소한다. 이런한 도덕 감각은 우리 관계를 시장 지향적이고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식 계산적인 관계로 보여지게 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벤담의 공리주의 때문에 여권 신장과 함께 동물 학대의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신성함에 대한 도덕 감각은 가장 악독하다.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은 그 한계가 없고, 도덕적 관계 맺기 모형 전환이 가장 어렵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면 더 크게 분노한다. 도덕적 원칙주의자들은 자신에게 터부인 거래를 생각해 보라고 주문했다는 점에서 더 큰 혐오와 분노를 보였고, 폭력에 호소하겠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서로 간의 신성한 가치를 상징적으로 양보하겠다고 하면, 분노, 혐오, 폭력에 의존하겠다는 결의가 줄어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덕적 관계 맺기 모형을 이동시키는 외생적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 분명한 힘은 지리적, 사회적 이동성이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섞여 들어갈 때, 자신이 믿었던 권위 서열, 신성함 등이 무너지고 타인에게 더 열린 자세가 된다. 한 예로 미국에서 공항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 타인에게 좀 더 관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성은 가장 중요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천사이다. 현대 좌파 이론가,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가와 우파의 종교 옹호자들은 20세기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는 계몽 시대 이래 중요시 여겨진 이성 때문이라는 데 서로 일치한다. 인간은 먼저 행동한 뒤에 나중에 미미한 이성을 발휘하여 본능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성을 비판하는 입장과 최악은 아니라는 입장 둘 다 잘못이다. 먼저 반대 증거를 보자면, 미국 대통령 지능 지수가 높을 때마다 전쟁의 사망자 수는 줄어드는 통계가 있다. (1점 당 13,440명) 홀로코스트는 민족주의, 낭만적 군사주의, 공산주의 운동 등 반계몽주의(반이성)의 결실들이었고, 베이컨, 홉스, 로크, 흄, 칸트 등 계몽주의 사상가의 계보를 잇지 않았다. 우리의 행동이 숙고 없는 직관의 결과일 순 있지만, 직관이 도덕적 추론의 유산일 수 있다. 아이를 채찍질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망설임 없이 아니오라고 하는 직관은 훈련된 증거이다. 이성은 여러모로 우리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성 자체가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이성은 자기 통제와 같이 가며, 이성은 도덕 감각과 상호 작용한다.(내집단과 외집단만 구분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나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정도에 따라 '비례'하여 계산하고 보상하는 능력은 이성이 같이 가야 한다.) 이성은 우리를 폭력을 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당사자 자신의 안녕을 염려하고, 자신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덕에 이성을 쓰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한 가지 대답은, 이성이 특정 똑똑이들만 사용해 계몽적 사상이 퍼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고 수준이 상승한 데 있다. 우리는 정말로 더 똑똑해지고 있다. 지능 검사는 우리가 10년마다 IQ가 3씩 올라간 기록을 보여준다.(플린 효과) 산수/어휘 능력이 증가하진 않았지만, 유사성 찾기, 비유 문제, 다음 순서 찾기 문제에선 증가를 보여준다. 이 속성들은 유전적 변화보단 학교 교육 의무화처럼 인지적 환경 변화 때문이다.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년, 수년 단위로 변화가 측정된다.) 이 같은 지능 증가와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는 도덕적 플린 효과도 가져다준다. 위에서 언급한 능력은 추상화 능력, 관점 전환 문제로 도덕적 범위를 넓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 학교 교육은 사람을 더 똑똑하게 만들고, 똑똑한 사람은 폭력을 더 꺼린다. 학교 교육은 다른 방식으로도 평화화 효과를 발휘한다. 이성은 폭력을 줄이는 마지막 천사다. 사회가 일정 수준으로 오르면, 폭력을 그 수준보다 더 줄이는 데 가장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바로 이성이다.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자유도가 너무 낮고 적용이 너무 제한적이었고, 이성의 힘일 발휘될 때 비로소 막을 수 있었다.
9. 역사 속으로 날아든 천사
위에서 언급한 천사들이 역사와 어떻게 어우러져 발현했는지 알아본다. 그전에 폭력을 줄였다고 오해할 수 있는 요인들을 짚어보자. 1. 군비 축소는 평화화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냉전시대 데탕트) 2. 자원 경쟁은 역사의 핵심적 역학이지만, 폭력의 거시적 경향성에는 영향이 없다. 오히려 민족주의, 파시즘, 혁명 등이 자원을 가릴 만큼 파괴적이었다. 남자들은 자원이 아니래도 싸울 이유를 만들었다. 3. 부유함 역시 평화가 정착된 후 커졌다. 계몽사상 이후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4. 종교는 폭력을 줄이기는 커녕 신성함을 무기로 학살을 자행했다. (마녀사냥, 종교재판, 중동의 갈등, 30년 전쟁) 그렇다면 폭력을 줄인 주요 요인들을 살펴보자.
리바이어던: 사람들이 서로 해치는 것을 막고자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가 가장 일관된 요인일 것이다. 폭력을 상쇄할 만한 금전적 처벌, 추방, 사형은 자기 통제를 가져온다. 공정한 제3자는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처벌도 대신해 주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면서 복수의 순환고리도 끊는다.
온화한 상업: 상업은 전쟁을 상호 이득의 게임으로 바꿨다. 혈연 이상의 관계에서도 이타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고, 협상을 위해 감정 이입을 할 수도 있었다. 서로가 꼴보기 싫은 상대일 수 있지만, 최소한 공격 의도는 낮출 수 있었다. 리바이어던과 온화한 상업은 유럽 문명화 과정의 두 추진력이었다. 서로 교역하는 나라들은 전쟁 가능성이 낮고, 기사들을 상인과 관료로 대체했다. 개방적인 나라일수록 집단 살해와 내전을 덜 겪은 사실도 있다.
여성화: 폭력은 주로 남자들이 저지른다. 그리고 여성이 평화주의, 인도주의 운동에서 발휘한 지도력은 당대의 다른 정치 제도들에 미친 영향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컸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자식을 고아로 만들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에서 물러나 있으려는 동기가 크다. 여성이 갈등 사회에서 참여할 경우,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굴욕이 훨씬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싸울 동기를 감소시킨다. 여성화는 정치 참여뿐만 아니라 남성다운 명예의 문화, 폭력적 보복, 스파르타식 교육과 체벌, 군사적 영광에 대한 칭송을 감소시키는 모두를 말한다. 여성은 술집보단 아이를 키울 학교를 선호하고(이성의 확산), 결혼을 무기로 젊은 남자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자제할 것을 권한다. (자기 통제)
세계주의: 우리가 적을 사랑하게 되고, 남들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적의 이득이 나의 이득이 되고, 나의 손해가 적의 손해도 된다. 공감의 범위가 확산될 때 우리는 감정 이입이 더 잘 됐다. 문해 능력, 도시화, 이동성, 대중 매체에의 접근성은 계속 발전해 왔고, 우리는 우리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더 인식할 수 있었다. 지구촌과 세계주의는 인도주의의 가치를 지지하는 통계에 연관성이 강함을 보여준다.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는 감정 이입과는 좀 다르다. 감정 이입은 나를 타인에게 대입 시키는 움직임이라면, 이성은 둘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이성은 다른 감소시키는 요인들과 다르게 논리적 추론과 그것을 기반한 경험적 축적이라는 베이스가 하나 더 있다. 앞서 봤듯이 이성은 감정과 다르게 제한 범위가 없다.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갈등을 토론하고, 역사에서 배우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다. 민주 정부, 칸트식 제동 장치, 국민 화해 운동, 비폭력 저항 운동, 국제 평화 유지군 등은 이성이 고안한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하지만 품위 있는 폭력 감소 장치이다. 비록 자주 속도가 떨어지거나 방향이 바뀌고, 저항을 겪지만, 가장 폭넓은 효과를 발휘하는 요소이다.
폭력의 감소는 우리 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덜 인식된 발전일지도 모른다. 사회 비평가들은 근대화를 저격하며, 과거의 목가적인 풍경, 전통적인 가치, 통일성, 종교적 신념을 찬양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향수들을 역사적 자료로 보았을 때 그들의 주장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과거에는 폭력이 도처에 존재했고, 국가는 그 폭력을 한곳에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 후 국가의 폭력, 국가 간 폭력은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가지고 조목조목 반박하며 그 정당성을 잃게 하였고, 오늘날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