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냥이 Oct 19. 2023

우리가 숏폼 영상에서 놓치는 것들

인문학의 호흡

강연을 기획할 때면 유튜브를 자주 본다.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서다. 내가 맡은 강연은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지만 유튜브에도 업로드된다. 해서 다른 유튜브 채널의 교양 콘텐츠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예컨대 콘텐츠 출연자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가 눈여겨본 연사를 섭외하거나 강연 주제나 구성을 차용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일의 연장선상으로 유튜브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자주 다)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10분 내외 짧은 영상이 유튜브를 점령한 것은. 처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내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숏폼의 홍수 속에서 떡 하니 한 시간 분량을 자랑하는 강연 영상이 외딴섬처럼 느껴진 탓이다.


인문학 강연 영상은 편집이 들어가도 최소 한 시간 분량으로 제작된다. 인문학의 성격이 압축과 파편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인문학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의 파도를 살펴보는데 방점이 찍혀있다. 오래전 현인들은 인간과 세상을 두고 어떤 질문과 생각을 던졌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보고, 이를 통해 얻은 지혜를 각자의 삶에 편입시키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느 부분만을 뚝 떼어 조각내는 방식은 인문학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강연을 준비하면서 영상 분량에 대한 고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인문학 강연이 원래 그런 걸. 그런데 부쩍 짧은 호흡의 영상이 대중의 이목을 끌면서 분량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 비해 강연 조회 수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도 한몫했다. 물론 수익을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재단 연구원이 영상 조회 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이왕이면 더 많은 이들에게 인문학을 접하게 하는 일이 나의 업이다 보니 조회 수라든지 대중이 선호하는 시청 트렌드를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대중이 보기 편한 방식으로 인문학을 맛보게 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 마침 새로운 미디어와 협업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 기회에 한 번쯤은 변화를 시도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제작진과 몇 차례 논의 나눈 끝에 분량과 인문학 특유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과감히 덜어내기로 했다. 분량뿐 아니라 자막 구성, CG를 삽입할 수 있는 스튜디오 등 강연 영상 전반에 변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분량은 이전보다 삼분의 일 수준으로 짧아졌지만, 영상 편집에 공이 들어가다 보니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됐다. 예산이 높아지니 재단 내부의 기대도 한층 높아졌다. 유명 미디어의 편집 실력을 빌리고 분량의 압박도 줄어들었으니 대중의 반응이 이전보다 높을 거라 기대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중의 반응은 미미했다. 오히려 기존 한 시간 강연보다도 조회 수가 낮았다. 어찌 된 일일까. 분량도 줄이고 편집 방식도 바꾸었으니 이전보다 보기 편했을 텐데. 뜻밖의 결과에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조회 수는 올라가지 앉았고 유튜브 댓글창도 썰렁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어 매일 출근하자마자 유튜브 댓글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댓글에 눈길이 멈추었다.

"글쎄. 별로 건질 게 없는 뻔한 얘기"     


마음이 내려앉았다. 내가 놓친 게 뭘까. 핵심만 남겨두고 지루한 분량을 다 잘라냈는데. 현란한 편집도 곁들였는데. 어쩐지 와닿는 게 없다는 다른 댓글들을 읽다가 이내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자르지 말아야 할걸 잘라냈어


인문학 강연의 목적은 생각의 소비가 아니라 생각의 생산에 있음을 나는 잠시 잊고 말았다. 생각을 소비하는 데는 긴 호흡이 필요치 않다. 남이 만든 생각을 편하게 줍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생각을 생산하는 데는 느슨한 호흡을 필요로 한다. 강연을 듣지 않았다면 해보지 않을 생각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느슨한 탐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 이야기"다. 이것만 봐서는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다. 이토록 뻔한 이야기를 작가는 장장 천 페이지를 통해 담아냈다. 독자는 천 페이지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주인공이 당한 배신에 함께 분노한다. 감옥을 탈출하는 장면에서 같이 기뻐하기도 하고, 과거 사랑했던 여인에게 복수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백작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뻔한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 이야기"는 이토록 느릿하고 구불구불 흘러가지만, 그 여정에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성공이란 뭘까. 행복이란 뭘까. 나를 배신하는 세상에 나는 무엇으로 갚아주어야 할까. 이것이 소설이 지닌 호흡이다. 그리고 인문학의 호흡이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느슨한 호흡.   


나는 영상을 만들 때 핵심에서 우회하는 듯한 대목을 걷어내 달라 제작진에 요청했었다. 이것으로 핵심만을 간결히 담아냈다고, 그러므로 영상을 보는 이들이 덜 지루하게 느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쓸데없는 대목을 걷어낸 게 아니었다. 내가 걷어낸 건 여담이 아니라 인문학이 지닌 호흡이었다. 생각의 길을 탐험하는 느릿한 호흡. "주위도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어보셔요. 이리저리 헤매셔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느슨한 호흡.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두 걷어내자 핵심만 남기는 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로. 짧게 핵심만을 남기자 어디서나 볼법한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마치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 이야기"처럼. 이토록 뻔한 이야기를 누가 일부러 찾아볼까. 그러니 조회 수는 오르지 않고 별로 건질 게 없다는 식의 댓글만 덩그러니 남은 것이겠지.




어느새인가 나는 글이 조금이라도 길어질라 치면 건너뛰는 습관이 생겼다. 글의 결론에 빨리 닿으려고 중간 부분을 건너 띄게 된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과거 3시간이 넘는 영화쯤 우습게 봤지만 이제는 90분 영화도 보기 힘들다. 그마저도 늘어지는 것 같으면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버린다. 그래서 결말이 뭔데 하면서. 불행히도 나의 성급함은 인문학의 느릿한 호흡을 점점 참아내질 못하는 듯하다. 인문학으로 벌어먹고 사는데도 그렇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때로 생각한다. 영화를 빨리 감아 볼 때, 나는 어떤 장면을 놓치고 있는 걸까. 서둘러 결론에 닿기 위해 건너뛰며 글을 읽을 때, 나는 무엇을 건너뛰고 있는 걸까. "야, 서론은 걷어치우고 핵심만 말해"라고 친구에게 다그칠 때, 나는 무엇을 걷어내고 있는 걸까. 구불구불한 길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나는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그 도착지가 이파리는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 옆은 아닐까. 그곳에서 나는 어떨까. 빨리 도착했다는 사실에 그저 만족하고 있을까.


당최 오르지 않는 영상 조회 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오늘 고른 영화를 빨리 감아보면서.

이전 07화 까다로운 연사에게 배운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