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의 장점 중 하나는 각계 명사를 가까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을 이와 일하는 과정은 매번 신선한 자극을 준다. 한 분야에서 최고 실력을 갖춘 이는 말 한마디에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런 분과 의견을 조율하며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일이 신입일 때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시간이 흘러 내게도 연차가 쌓이자 연사를 대하는 부담감은 점차 옅어졌다. 그러나 남달리 까다로운 연사를 만날 때면 신입 시절 느꼈던 긴장감이 다시금 찾아온다. 강연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매 단계 꼼꼼히 챙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분을 만나면 강연을 준비하는 실무진은 그야말로 초긴장상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때는 3,000명 규모의 대중강연 시리즈를 준비하던 시기. 강연 규모가 큰 만큼 방송사, 신문사, 출판사, 유명 대학, 공공기관 등 다수의 파트너와 협업하는 강연이었다. 협업 주체가 많은 것도 부담이었지만 3,000명의 이목을 끌만한 연사를, 그것도 10명이나 섭외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가장 먼저 후보 연사로 지목된 분은 탁월한 연구실력과 매끄러운 말솜씨로 대중매체의 관심을 끌던 A교수였다. 당시 신입이었던 내게 A교수를 섭외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나는 A교수에게 당신이 참석해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메일에 적어 보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던 회신이 도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보니 강연을 수락하겠다는 한 줄이 적혀있었다.
"아아악!!!!!! 우리 강연에 참석하겠대요!!"
반 포기 상태로 보낸 메일에 OK 회신이 오자 그야말로 뛸뜻이 기뻤다. 스케줄이 차고 넘칠 텐데 우리 강연에 와줄까. 강연료도 많지 않은데, 하고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A교수의 섭외로 3,000명 모객이 어렵지 않으리라는 야심 찬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A교수 섭외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연 기획자가 강연을 준비하면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대중의 눈높이다. 대중강연은 말그대로 대중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사의 메시지도 좋아도 대중에게 와닿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나는 늘 고민에 빠진다. 학문이라는 딱딱한 포장지에 싸인 인문학 메시지를 어떻게 말랑 말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으로 A교수에게 강연 제목을 손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A교수가 보내온 제목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다소 어렵고 딱딱했기 때문이다. 강연 제목은 대중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는 메시지다. 일종의 카피라이팅 역할이라고나 할까. 강연 제목은 모객과도 연결되었기에 무심히 지나갈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담아 A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몇 분 후 날아든 메일 한 통.
강연 제목을 바꾸라는 건 강연 내용을 바꾸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강연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당시는 강연 한 달을 앞둔 시점. 연사 섭외가 마무리면서 대대적인 홍보를 앞두던 상황이었다. 3,000명 모객을 자신한 데는 A교수를 믿은 구석이 있었던 탓에 눈앞이 캄캄했다. 부랴부랴 사과 메일을 보냈지만 A교수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주말이었지만 상황이 다급한지라 상사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섭외해.
며칠 후 무작정 A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전략이었다. A교수가 좋아한다는 와인을 사들고 하염없이 기다리길 몇 시간째. 드디어 저 멀리 A교수의 실루엣이 보였다.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몰려왔다. 여기 왜 왔냐고 화내시면 어떡하지. 그러나 A교수는 뜻밖의 환대로 나를 안내했다. 연신 죄송하다고 읊조리는 내게 A교수는 자신이 강연을 거절했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연 지식인은 지식인인지라 논리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강연 제목에 핵심이 담겼다고 했다. 그는 섭외 연락을 받고 고심을 거듭해 제목을 선정한 거였다. 그러니 제목을 수정해 달라는 나의 제안이 그분에게는 강연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다. 아, 내가 선을 넘었구나. 죄송한 마음에 연신 고개가 숙여졌다.
A교수는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휴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이러면 내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그는 예정대로 강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휴. 긴장으로 묶여있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보류되었던 강연 홍보가 재개되며 A교수 사진이 인쇄된 홍보물이 서울 전역에 뿌려졌다. 연사의 유명세 덕분인지 강연 신청이 순식간에 오천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어쩐지 긴장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강연일까지 아무 일 없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다가온 A교수의 강연 당일. 혹시나 하는 우려는 기어코 현실이 되었다. 강연 시작 30분을 앞두고 A교수가 무대 장치 수정을 요청한 것이다. 본 강연은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강연 전 방송용 무대 장치를 설치한다. 방송 스텝은 사전에 연사 위치를 마킹해 놓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조명과 카메라, 무대 장치를 세팅해 둔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작업은 실로 몇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나도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어찌하랴. 연사의 요청 사항을 무시할 수 없는형편이었다.
PD에게 A교수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니 예상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간단하게 옮기는 작업이 아녜요. 조명, 카메라 위치 다 바꿔야 한다고요. 30분 안에 못합니다. 그러나 A교수는 완강했다. 이 무대에서는 강연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금세 험악해진 PD는 A교수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더니 무대 장치 세팅을 고치기 시작했다. 연사가 강연을 못하겠다는데 PD도 할 수 없다. 방송은 찍어놓고 봐야지.
시작 오 분 전 간신히 무대 세팅이 끝났다. 허겁지겁 강연장을 돌아보니 어느새 청중석이 꽉 차있었다. 나는 강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와 함께 연사 소개를 이어갔다. "오늘 이 분을 모시려고 저희가 많은 공을 들였는데요. 귀중한 말씀을 전해주실 교수님을 큰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강연장을 들썩이는 청중의 박수소리를 헤치며 A교수가 무대를 걸어 나왔다.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이어 마이크를 빼고 삐딱한 팔짱을 꼈다. 자, 내 할 일은 모두 끝났어. 이제부터는 당신 차례야.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그런데 맙소사. 애써 참으려 했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인문학과 동떨어진 전문 분야를 인문학적 메시지로 절묘히 녹여내는데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생생했다.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틈틈이 튀어 오르는 유머는 또 어떻고. 청중이 웃는 사이 A교수는 능숙하게 자신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로 끌고 갔다. 메시지는 장황하지 않았고 뻔하지 않으면서 명확했다. 이윽고 강연이 끝나자 청중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저 멀리 굳어있던 PD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보였다.
강연자 대기실로 돌아온 A교수에게 나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돌아가시는 길 불편함 없게 차량 준비해 드릴게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도 준비했어요? 에이 진짜 중요한 거에 신경 써야지. 나는 알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말아요. 오늘 다들 수고했어요." 진짜 중요한 거에 신경 써야지. 어쩐지 이 말이 쿵하고 꽂혔다. 멀어지는 A교수를 보며 그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의 말을 되뇌이다 드디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A교수의 까다로운 행동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여기에서 일일이 밝힐 순 없지만 A교수의 강연 준비 전 과정이 아슬아슬했다) 그는 대중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갈고닦은 지식과 인사이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했고 여기에 자신의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혹여 대중에게 혼동을 줄세라 단 하나의 단어 수정도 용납하지 않았고, 강연에 방해가 되는 무대 장치의 불편함도 모두 제거했다. 그래야 온전히 강연에 집중할 테니까. 그래야 자신이 공들여 세팅한 메시지가 대중에게 오롯이 전달될 테니까.
까탈스럽게만 느껴졌던 A교수의 행동은 프로의 태도였다.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한. 자신이 준비한 강연이 어떻게 대중에게 전달되느냐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마다하지 않는 차량 의전에는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맞았음을 증명하듯 A교수 강연은 적잖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폭발적인 유튜브 조회 수와 뜨거운 방송 반응이 이를 입증했다. 그를 만난 이후 종종 생각하게 된다. 프로가 일하는 태도에 대해서. 프로와 일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여전히 가끔씩 이것저것 요구사항이 많은 까다로운 강연자를 만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이 분은 강연을 잘 준비하고 싶구나. 예전 같으면 잔뜩 늘어놓았을 불평 대신 나는 속으로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당신에게 중요한 일에 집중하세요. 제가 한껏 도울테니.'
그러면서도 강연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 모를 의견을 이것저것 내놓는다. 그게 내 일이니까. 대중강연의 주인공인 청중에게 메시지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나 또한 프로로서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