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사의 '말'이다. 연사가 쓰는 말을 통해 강연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말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청중을 설득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사를 섭외할 때면 전문성 못지않게 전달력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말이 횡설수설 하진 않는지, 현학적인 말 일색인지, 대중에게 불편한 표현을 쓰진 않는지 두루 살핀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의 깊게 보는 것은 연사의 말투다. 말이 유창하고 말고를 떠나서 메시지를 담는 말투가 어떠한가를 본다.
한 번은 높은 유명세를 떨치는 스타급 연사를 섭외한 적이 있다.(편의상 모교수라고 부르겠다) 그는 유명세에 걸맞게 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와 수천 명의 청중 앞에도 긴장하는 내색이 없었다. 모 교수는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강연 중반부에 접어들었을까. 나는 슬슬 모교수의 말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모 교수 특유의 강연 스타일인 호통과 반말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단시간 대중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 그런 어법을 쓴다고 자신의 강연 스타일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나는 모 교수의 말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영상으로만 보다가 현장에서 육성으로 들으니 그 불쾌감이 더욱 컸다.
하지만 모 교수 말에서 전해오는 불쾌감과는 별개로 그의 메시지는 꽤 좋았다. 듣던 대로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왠지 모를 찝찝함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용만 좋으면 그를 담는 그릇이 좀 거칠어도 괜찮은 걸까.
신영복의 『담론』에는 귀곡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 기원전 350년 전후로 생존했던 귀곡자라는 실제 인물이 있다. 이들은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 현황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각국의 군주들과 상담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귀곡자는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어법은 실패한 거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는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혜로움으로 어리석은 사람을 모욕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실패한 어법이라는 주장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한 남성이 다가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다른 사람 있는 앞에서 당신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대화를 이어가면 어떻겠는가. 당신의 무지를 일깨워준 소크라테스에게 고맙겠는가, 당신의 무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소크라테스가 얄밉겠는가. 나라면 반감이 먼저 들었을 듯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러느냐고 버럭 화를 냈을 거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인들이 괜히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게 아니다.
귀곡자의 말을 빌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신영복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를 사용할 때는 말을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 또한 이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랫동안 동의하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수긍하게 되었다.
직설적인 말이 솔직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특히 윗상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태도를, 나는 용감하다 여겼다. 직설적이어도 상사에게 할 말은 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 이런 나와는 다른 선배가 있었다. 상사의 지시가 어불성설인걸 알면서도 상사의 안색을 살피며 자신의 의견을 우회하는 선배의 태도가 내 눈에는 가식으로 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보란 듯이 직설적인 말을 내뱉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기존에 내리신 지시와 어긋나는데요. 기억을 못 하시나 보네요. 자꾸 말이 바뀌시면 곤란해요."
결과는 늘 같았다. 나는 매번 상사와 부딪혔고 선배는 매번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이런 가식을 봤나. 뒤에서 상사와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한 게 누군데. 어느 날 나는 선배를 붙잡고 따졌다. "선배, 너무 가식적인 거 아녜요?" 선배는 덤덤히 대답했다. "나는 예의를 갖추는 거야." 당시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몇 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선배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솔직함과 무례함을 혼동하는 내가 안타까웠겠구나.
솔직함은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함이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면 그건 무례함이다. 자신의 언행이 솔직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언행이 무례한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게 의사소통의 기본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본을 혼동했다. 게다가 가식의 의미도 혼동했다.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는 가식이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보다 낫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우리가 내뱉는 모든 언행들은 상대방과 교류하기 위한 것이고 그 교류에서 가장 고려해야 하는 건 결국 상대방이다. 지혜로웠던 선배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혹 함께 일하기 힘든 상사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게 자신의 도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가식적이라 생각했던 선배는 예의 있었고 솔직하다 생각했던 나는 무례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못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말투를 신경 쓰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말투'란 좋은 그릇에 담아 언어를 전달하는 태도다. 말을 하는 과정에서 투명한 말그릇에 내 생각을 여실히 담아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방이 베이지 않을 질 좋은 말그릇을 고르고 또 골라내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 인간은 혼자 말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언어를 발명했다. 그렇기에 언어의 최종 도착지인 상대방을 위해 말그릇을 고르는 일은 언어의 본질을 반영하는 일이다.
물론 좋은 그릇을 반복해서 골라내는 작업은 지난하다. 인생사 모든 일이 그렇듯 한 번에 좋은 그릇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고르고 또 골라야 한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릇을 고르는 이에게 슬슬 변화가 찾아온다. 말에, 인격에, 행동에 무언가 깃들기 시작한다. 무엇이? 품격이라는 것이.
나는 연사를 섭외할 때면 자신의 말그릇을 정성스럽게 고르는 이를 찾아 헤맨다. 그런 정도의 수고를 감수하는 사람이어야 대중 앞에 설 수 있다는, 나만의 작은 고집 같은 거다. 그래서 늘 연사 리스트를 훑어볼 때마다 질문을 던진다. 누굴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좋은 말그릇을 고르고 있을 사람이.
그런데 가만. 이 글을 쓰는 하얀 책상 위에 문득 옅은 커피 얼룩이 보인다. 젠장,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누가 이랬는지 짐작이 간다. 나는 그릇을 찾을 새도 없이 버럭 소리친다.
"야!! 내가 이거 이렇게 놓지 말랬지! 이거 하얀색이라서 컵 받침대 꼭 놔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귓구멍이 막혔나, 정말!!"
좋은 그릇을 찾는 문제는 이래서 골치 아픈 거다. 한 번 찾아본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한다. 좋은 그릇을 다시 찾자. 다시.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