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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멀고도 가까운, 유명 연사와 대중의 삶

내가 대중강연에서 섭외하는 연사는 대부분 유명 지식인 또는 사회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 종교인이다. 대중강연에서는 어떤 연사를 섭외하느냐에 따라 메시지의 신뢰성이 좌우된다. 똑같은 메시지라도 메신저가 누구냐에 따라 대중에게 전달되는 무게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강연 기획자는 연사를 선정할 때 그들의 전문성, 인지도, 평판, 전달력 등을 검증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검증과정에서 수많은 연사가 탈락되지만 유명 연사는 이를 가뿐히 통과한다. 검증된 자료가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저명한 연사를 최종 섭외하게 된다.


이렇게 섭외된 연사는 청중의 환호를 받으며 강연 무대에 오른다. 그들의 강연을 듣고 있으면 나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듣던 대로 명강연이군. 하지만 때로 고개가 슬쩍 갸웃해지는 때가 있다. 얽히고설킨 삶의 난제로 고민하는 청중에게 인생 조언을 건네는 연사를 바라볼 때가 그렇다.


인문학 강연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삶의 난제를 안고 온다.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살까. 내 자식은 왜 이리 말을 안 듣는가. 내 삶은 어찌하여 좌절의 연속인가. 남들은 잘 나가는데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인생이 던진 온갖 질문을 안고 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연사는 열성을 다해 인생 문답식의 해법을 내놓는다. 이러면 어때요. 저러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럴 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평생 고상한 상아탑에 머물렀을 그들이, 세속과 단절된 채 종교라는 고요한 첨탑에 머물렀을 그들이, 일반 대중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알 수 있을까.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사는 직장인의 애환을 일류대 교수가 알 수 있을까. 남보다 못한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산속에 묻혀사는 종교인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경험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을 명사의 인생 조언에는 얼마큼의 진정성이 묻어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나는 늘 고개가 갸웃해졌다.


한 번은 클래식 공연 준비를 위해 유명 음대 교수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당시는 초유의 국정농단으로 대통령 탄핵 시위가 연이은 시기였다. 최근의 정세를 주고받으며 걱정 섞인 말들이 오가던 중 교수님이 던진 한 마디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분노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니,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데 그래요?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클래식 공연으로 사람들 분노를 좀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요."


클래식 연주로 잠재울만한 우아한 분노였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뛰쳐나올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라고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애꿎은 국수 가락만 휘저을 뿐. 평생 클래식 연주에 전념하는 생활이 가능했을 그분의 나라는 정말 살기 좋았을 테다. 그러니 왜 이 좋은 나라를 두고서 분노를 터뜨리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분노를 모르는 나라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선율이, 분노가 뒤덮인 나라에 살고 있는 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클래식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줄리엣과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로미오를 두고 친구들이 마구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한껏 비웃은 친구들이 사라지자 로미오는 중얼거린다.


다쳐 본 적 없는 자가 흉터를 비웃는 법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타인의 아픔을 관망하는 인간 본성을 통찰했다. 우리 인간은 타인의 흉터가 얼마나 깊을지 가늠하지 못한다. 직접 다쳐보지 않는 한. 그래서 신형철은 "인간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 타인의 슬픔"이라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울적해진다. 이게 인간의 한계가. 다쳐보지 않고는 타인의 흉터를 비웃는 게 우리 본성이라면 남의 상처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건 가식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얕은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이어지는 신형철의 말에 눈길이 멈췄다.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이 역설을 인정할 때 나는 불편해지고 불우해진다. 그러나 인정은 거기서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8쪽), 신형철 -


그는 불우히 인정한다. 타인의 슬픔을 우리는 끝내 모르고 살아갈 거라고. 그러나 신형철은 인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에 닿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그는 말한다. 이 문장을 읽다가 잠깐 호흡을 멈추었다.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 않는 것. 이게 어떤 뜻인지 언뜻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6개월간 준비한 클래식 공연이 열리는 날.

공연 시작을 앞두고 기도를 올리는 교수님께 나는 농담 겸 물었다.


"교수님, 공연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거예요?"

"청중에게 제가 준비한 연주가 잘 닿을 수 있게 해 달라고요. 그분들을 위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주 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할 수 있는 게 연주뿐이라는 교수님의 말이 어쩐지 귓가에 맴돌았다. 무대에 오르는 교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스치듯 생각했다. 자신이 일생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연주를 준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슬픔을 공부하는 교수님만의 방법일지 모른다고.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어서 오셨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평생 클래식을 배웠습니다. 제가 평생 배운 공부로 당신의 슬픔을 공부하겠습니다." 힘든 시기, 대중을 위로하는 연주회를 열고 싶다던 교수님의 말에는 이 말이 숨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또 어쩌면 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명사의 조언에는 이 뜻이 숨어 있었던 걸까. "대학에서 철학 공부만 해온 저라서 당신의 슬픔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배운 공부로 당신의 슬픔을 공부하려 합니다." 연사가 청중에게 내민 손은 자신이 평생 해온,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로 타인의 슬픔을 헤아려보려는 작은 시도였던 걸까. 인간은 결코 타인의 슬픔에 닿을 수 없다는 한계를 긍정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해온 공부로 슬픔 언저리라도 배회하기 위해.



교수님이 준비한 클래식 공연은 객석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끝이 났다. 객석이서 몇 번이고 앵콜이 나왔다. 교수님의 기도가 닿았던 걸까. 교수님의 공부가 청중에게 닿았던 걸까.


멋진 공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안락한 울타리에 살면서는 결코 대중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기 힘들 거라고. 유명 연사가 무대에서 하는 인생 조언도 그저 하는 말 뿐일 거라고. 하지만 잠시 동안만 그들을 향한 차가운 눈초리를 멈춰 보기로 했다. 먼저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다. 그들의 말을 의심하기 전에 반드시 나 자신에게 먼저 물을 게 있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기 위한 너의 공부는 무엇이느냐고.

그러는 너는 무엇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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