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냥이 Oct 19. 2023

니체의 말은 틀렸다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겁쟁이로 만든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흔히 사람들은 이 말에 '고통'을 대입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로. 이후로 이 말은 삶의 고통을 마주한 이들을 위로하는 명제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말에 선뜻 공감이 가질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죽이지 못한 고통은 더욱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서른을 앞둔 무렵. 어느 날 갑자기 가슴 쪽에 통증이 찾아왔다. 예기치 못한 통증에 급히 병원을 찾으니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폐에 종양이 있다는 것. 다행히 악성은 아니어서 종양을 도려내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했다. 의사는 덧붙여 말했다. "양성이긴 한데 종양 크기도 크고 유착 정도가 심해 보여서 폐를 좀 잘라낼 수도 있습니다. 뭐 그래도 나이가 젊어서 금방 회복되실 겁니다." 폐를 잘라낸다는 말이 무시무시했지만 마치 종이 자르는 일인 양 무심한 투로 말하기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의사가 괜찮다는데 뭘. 그렇게 별다른 걱정 없이 수술대에 올랐다.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폐종양 제거 수술이 끝난 모양이었다. 아직 전신 마취 기운이 풀리지 않아 나른한 몽롱함이 느껴졌다. 몇 분쯤 흘렀을까. 가슴 부근에서 기분 나쁜 통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의사가 말했다. "환자분, 수술은 잘됐습니다. 이제부터 마취가 풀려서 좀 아플 거예요. 폐를 생각보다 많이 잘라냈어요. 앞으로 12시간 동안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 진통제는 못 드려요. 보호자분께서는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시고 환자가 잠들지 못하게 깨워주세요."     


폐에 자리 잡고 있던 종양이 꽤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녀석을 도려내느라고 예상보다 많은 범위의 폐를 잘라냈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의 충격이 생각보다 클 것이라고. 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극렬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무지막지한 고통이었다. 누군가 칼로 몸 안을 들쑤시는 느낌. 아니지. 칼 정도가 아니었다. 수백 톤의 날카로운 철제물이 내 몸을 관통한 느낌이었다. 1분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12시간이나 견뎌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12시간 동안 진통제를 맞을 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잔인해지는 통증 앞에 나는 그만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꺼이꺼이 우는 내게 통증이 얄밉도록 속삭였다. 안녕, 지옥에 온 걸 환영해.     


8시간쯤 흘렀을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나는 제발 진통제를 달라고 애원했다. 서둘러 달려온 의사가 말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잘 참으신 거예요. 대부분 마취 깨자마자 달라고 하세요. 일단은 진통제 없이 참아보시라고 말씀드린 거였어요" 뭐라고? 환자를 두고 인내력 테스트를 해? 참느라 죽는 줄 알았잖아, 이 망할 의사야. (당시의 심정이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해 마시길. 나는 아직도 쉽지 않은 수술을 해주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다행히 수술 부위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바쁜 일상 속에 수술한 기억도 금세 잊혔다. 하지만 내 몸은 수술의 고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 모양이다. 이전 같으면 지나쳤을 사소한 통증에도 몸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세한 두통이 느껴질라치면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는 만사를 제쳐두고 두통약부터 찾았다. 회사에 있다가도 몸 어딘가에 사소한 통증이 느껴지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상처를 입는 일도 부쩍 두려워졌다. 부상을 입는 순간 닥칠 고통이 미리 가늠된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의 고통을 상기시키는 모든 종류의 통증을 피해 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통증이 노크할 때마다 내 몸은 마치 이렇게 소리치는 듯했다. "휘이 훠이 오지 마. 우리 두 번 다시 보지 말자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통증을 겪은 이후로 나는 사소한 통증도 참지 못하는 엄살쟁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신체적 고통만이 나를 엄살쟁이로 만든 건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 어느 정도 가난했냐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당장 먹을 쌀이 떨어져 친구에게 쌀을 빌리러 간 적도 있었고, 식재료 살 돈이 없어 된장만 말갛게 푼 국에 밥을 말아 며칠이고 버틴 적도 있었다. 공과금을 내지 못해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집에서 견뎠고,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 초인종을 눌러댔다. 중고교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시로 교장실에 불려 갔고, 매번 수학여행 비용을 내지 못해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준적도 있다.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가난을 떠올리는 모든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상황이 오면 불안이 아닌 공포를 느낀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느냐만은 내가 느끼는 공포는 차라리 눈뜨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다. 누가 멱살을 잡아채어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로 다시 데려간 느낌이다. 그래서 수시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 되었다. 공과금 고지서에 흠칫하는 것도 여전하다. 연체된 공과금을 알리는 빨간 고지서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아서다.    


빚쟁이들이 눌렀던 초인종 소리를 떠올라 성인이 된 아직도 초인종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배달 음식을 시킬 때면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허름한 장소에 가는 것도 가급적이면 피한다. 어릴 적 살았던 집을 연상케 하는 허름한 집과 골목을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래시장도 가지 않으며, 이름난 맛집이라 해도 공간이 허름하면 절대 가지 않는다. 어릴 적 겪은 가난의 고통이 내게 준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남루한 그림자를 멀리서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도망가는 모습.  

          

그렇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는커녕 겁쟁이로 만들었다. 사소한 신호에도 극도로 예민해져서는 고통의 언저리만 가도 화들짝 놀라는 엄살쟁이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통의 예민한 촉수는 내게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인가 고통을 감지하는 촉수는 몸 바깥까지 뻗어나갔다. 수술의 고통을 겪은 이후로 나는 어디가 아픈 것 같다고 말하는 주변인의 말을 무심코 지나치지 못한다. "얼마나 아파? 뭐 조금? 큰일이네. 당장 병원에 가자." 결국 병원엘 다녀왔고 별 일 아니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맘이 놓인다.      


영화나 책, 드라마를 볼 때도 그랬다. 몸이 아프거나 힘든 상황에 처한 이의 눈물을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눈물 버튼이 눌렸다. 세상에,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멀리서 보는데도 겁이 나고 안쓰러웠다. 한 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다가 숨이 막힐 뻔했다. 주인공 마카르 제브스킨이 돈이 없어 벼랑 끝에 내몰리는 대목이 현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가난을 안락한 의자에 앉아 태연히 구경할 자신이 없어 도중에 책을 덮어버린 기억이 선명하다.    

  

어느새 뉴스를 보는 일도 고역이 되어버렸다. 반지하집이 침수를 당해 망연자실한 수해민. 전세사기로 모아둔 돈을 모두 잃고 한순간에 가난해진 일가족. 음주운전사고를 당한 이후 복합통증증후군을 앓게 된 여성. 돈이 없어 생필품을 훔쳤다는 국가 유공자 할아버지. 이 사람들의 고통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여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나, 저 사람들 참 힘들 텐데. 예민해진 촉수로 세상을 더듬으니 가슴 쓸어내릴 일이 차고 넘쳤다. 그만큼 눈물 흘릴 일도 많아졌다. 내 것이 아닌 고통을 감지하는 일은 그것대로 아프고 괴로워서 가슴 아픈 사연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통을 겪어내자 점점 고통에 예민해지는 나는 약해지고 있는 걸까, 강해지고 있는 걸까. 강해졌다면 어떤 고통 앞에서도 의연해야 할 텐데 도무지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고통의 그림자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행여 가까이 올세라 피해 다니기에 급급하다. 남이 당하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무엇일지 가늠하는 것만으로 두렵고 무섭다. 이런 내가 강해진 걸까? 아무리 봐도 아니다. 이런 모습은 강한 이의 것이 아니다. 문득 생각한다. 니체는 어땠을까.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던 니체는 정말 강해졌을까.     



188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니체는 한 마부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장 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이후 니체의 정신은 무너졌고 고통스러운 질병을 겪다 사망했다. 말을 끌어안고 목놓아 운 니체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분명한 건 의식을 잃기 전 니체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시도였다는 점이다. 무엇이었을까. 말에게 달려가면서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너의 고통을 껴안을게. 내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생 초인을 찬양했던 니체는 말의 고통을 껴안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결말일까. 어쩌면, 하고 짐작해본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던 니체의 결말이, 채찍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정신을 놓아버리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거라고. 어쩌면 고통의 목적은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고. 나는 알지 못하는 그래서 느끼지 않아도 될 아픔을 자진해서 끌어안는 것이 고통의 목적일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고통의 촉수가 내 몸 바깥까지 예민해지는 데는 이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자신의 목적지에 닿기 위한 전조 증상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미지의 고통을 끌어안기 위한. 불현듯 흠칫해진다. 오싹하기까지 하다. 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인지라 내 것이 아닌 고통까지 끌어안고 싶진 않다. 세상에 얼마나 아플 거냐고. 내 몸에 난 상처 보듬기도 바쁜데.  

 

나날이 예민해지는 고통의 촉수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씩 겁을 집어먹고 있다. 이 녀석이 어디를 향해 갈지 조금은 짐작이 된 탓이다. 역시 니체의 말은 틀렸다.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겁쟁이로 만든다. 그것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겁쟁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