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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희 Nov 29. 2024

내겐 참 어려운 사랑

내리사랑, 그 깊은 마음


 궁극적인 ‘앎’을 위해서는 ‘함’이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느낀다. 운전면허 필기를 내내 공부해도 운전의 모든 것을 제대로 알 수는 없고 직접 운전대를 잡아보아야 진짜 운전이 뭔지 알 수 있다. 요리 유튜브 영상을 백번쯤 보아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진정 그 요리법을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즉 진정한 이해에는 직접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해보지 못해서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나는 부모가 되어보지 못해서 부모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저 그럴 수도 있지, 그런가 보지, 하고 넘길 뿐이다. 30대가 되면서 주변에 출산한 친구가 여럿 생겼는데, 친구가 임신해서 축하파티를 할 때나 출산 후 조리원에 있는 친구에게 고생했다는 전화를 걸 때 그 친구에게 나는 늘 묻는다. “이제 모성애가 생겼어? 무슨 마음이야???”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모호한 감정은 손에 꽉 잡히지 않고 둥둥 떠다니며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울게 한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우리 엄마 아빠에게서 온다. 막내인 나는 오빠보다 어화둥둥 자랐다. 부모님의 기대를 듬뿍 받으며 철저히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키워진 오빠와는 다르게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막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자랐다. 못하는 걸 천천히 배워도 괜찮았고, 집안일도 해본 적 없이 너그럽게 컸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나만 좋아했다는 건 아니고, 부모님이 오빠에게 가지는 사랑의 방식과 나에게 가지는 사랑의 방식이 조금 달랐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딸인 내가 혹시 험한 일이 생길까 항상 걱정이 많았다. 대학 새내기 시절 겨울 방학에, 나는 바코드를 찍어보고 싶다는 로망 실현을 위해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편의점 알바에 지원했다. 시간은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주3 근무였다. 면접을 보자마자 합격 통보를 받고 엄마 아빠에게 신나서 말했는데, 아빠 표정이 안 좋았다.


“그 밤에? 편의점을? 위험해서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파트 옆이라 안전하던데?! 점장님이 내가 듣고 싶은 노래 다 틀어도 된대! 들어오는 물건 정리도 안 해도 되고, 계산만 하래!”


 우겨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빠는 아무래도 위험하다며 퇴근 시간에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당시 직장 생활을 해본 적 없던 나는 다음 날 출근을 앞두고 밤 12시까지 누구를 기다리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르고 가볍게 알았다고만 했다. 아빠는 내가 편의점 알바를 하는 내내 12시에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아빠에게 폐기 삼각김밥과 빵을 한가득 주며 함께 퇴근했다. 아빠는 너무 당연하게 검정 봉다리를 들어주고 오늘 있었던 알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3개월 후 개강을 맞아 편의점 알바를 그만둔 후 알게 된 것인데, 아빠는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 편의점 주위를 뺑뺑 돌고 있었다. 내가 혼자 지키는 편의점에 이상한 사람이 오진 않을까, 무서운 상황에 처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나 보다. 티 내면 내가 불편해할까 봐 신경 쓰였는지 나에게 티도 안 냈다. 그저 영하의 온도에서 환한 편의점 불빛을 보며 주변을 서성였을 뿐이다. 하지 말란 일을 하는, 더럽게 말 안 듣는 철없는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자신이 없다.


 올초 엄마와 둘이 해외여행을 갔다. 엄마는 다 커서 독립한 딸이 엄마를 데리고 해외를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다 부러워했다며 연신 신나 했다. 엄마는 여행사 패키지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닌 사람이라 엄마에게 든든한 가이드가 되어야겠다는 책임감에 활활 불타올랐다. 여행사를 끼지 않고 나랑 둘이 가니 불안하더라 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여행 동안 내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동공이 마구 흔들렸는데 (엄마가 걱정할까봐) 엄마는 늘 아무렇지 않다고 천천히 하라며 나를 토닥였다.


 한 번은 함께 현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나왔는데, 엄마가 내가 든 장바구니를 휙하고 낚아챘다. 무거우니까 엄마가 든단다.


“엄마. 엄마는 60대고 나는 30대인데 내가 드는 게 맞지 않아?”

“그래도 이건 니가 들기에 너무 무거워.”

“그니까 젊은 내가 든다고용.”


 서른 살 넘게 먹은 딸이 엄마의 보호자가 된 상황에서도 엄마는 내가 여전히 장바구니 하나 못 드는 아가인 거다. 너무 당연하게 이런 건 무거우니 엄마가 드는 거라는 그 말이 나를 웃게 하고 또 울게 한다.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이길 수 없단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큰데 부모님은 도대체 날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라 때때로 출산과 육아가 두렵기도 하다.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해 볼 수조차 없다.


 한 학급을 운영하다 보면 생각보다 학부모님들이 담임 앞에서 많이 운다. 사춘기 아이와 사이가 멀어져 우는 분도 있고 아이의 말에 크게 상처받은 분도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엉엉 우시는 분들도 많다. 휴지를 건네고 물 한 잔을 드리며 위로하지만 그 마음을 완연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다.


 언젠가 알 수 있을까, 나도? 한없이 깊은 바다와 같은 부모의 내리사랑을. 자식에 대한 모성애의 온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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