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커리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by 고희수

연말을 맞아 인사 평가서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나의 쓸모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오늘날의 나는 이 대한민국에서 몇 등쯤에 서있을 까요? 나는 얼마쯤 될까요? 20대의 나는 이 물음에 명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카피라이터, 콘텐츠 기획자, 연봉 1억처럼.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나를 설명하는 타이틀을 만들려고 무던히 노력했죠.


하지만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나에게 명료했던 단어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지금은 ‘일하는 나, 언제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고민만 남은 것 같습니다. 훌륭한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은 회사 안에서 자기만의 방향을 뾰족하게 가져가면서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 내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은 알고 있죠. 우리는 회사가 시키는 일을 회사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서 해야 하고, 그 이상의 성과와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많은 야근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일을 나의 우선순위에 두고 주말과 평일, 밤낮없이 일하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커리어 대부분은 그런 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런 일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걸 몸과 마음의 병을 얻고 나서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분명히 아는 사람이고, 그걸 위해 달려왔는데 한순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사실 나는 그 삶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걸 병원에 2주 간 입원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동안에도 지금이 멈춰야 할 때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회사에서 다 못하고 온 일을 생각하고, 내가 끼친 민폐에 대해 곱씹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아픈 게 아닌데 (사실 많이 아픈 상태였슴) 가만히 병동 침실에 누워있는 게 사치 같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 병실 간호사에게 잡혀간 적도 있습니다.


방황이 시작된 건 한참 전 일이지만 아직도 우선순위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의 일과 일상이 더 이상 하나의 우선순위 만으로 정해질 수 없단 걸 시간과 건강을 까먹고 깨닫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직 병동 침실에 누워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나를 과보호하고 도태되는 중인 건지 아니면 정말 보호가 필요한 건지는 아직도 명확히 구분이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오래하면 더 알게 될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가르쳐 주는 건, 뭐가 됐든 그걸 견디는 나란 사람을 발견한 것 밖엔 없는 것 같네요.


올해 나는 어떤 일을 했을까 돌이켜 봅니다. 일에는 최대한 에너지를 덜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회사에게 미안하지만, 회사와 나의 결 멀어져 가는 걸 체감한 한 해였습니다. 내가 열심히해도 회사에선 만족스럽지 않았을테고, 회사의 기준에 맞추기엔 내 머리가 너무 커버린 것 같군요. 외에 시간에 글을 쓰고, 읽었고, 노트 속에 머리 속에, 삶 속에 차곡 차곡 채워갔습니다. 뜨개질도 많이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났네요. 나로 사는 건 만족스러웠던 한 해 같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내가 봤다면 커서 뭐가 될래 쯧쯧 자조했을 겁니다. 세상에 눈치 볼 것이 너무 많은 마당에 과거의 나의 눈치까지 볼 필요는 없겠죠?


그래서 오늘날의 나는 누구일까요? 레이서처럼 목표를 향해 1등이 되기 위해 달렸던 날들은 지나가고, 이제는 그냥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전엔 카피라이터로, 책도 5권쯤 내고, 대기업에 강연 다니는 내가 꿈이었다면, 지금은 코어가 튼튼한 할머니가 되고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쟁취되기보다 꾸준히 일상을 살아낸 누군가들이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발견한 책의 한 글귀를 남기며 마무리해봅니다. 오늘도, 내일도 정처없이 자신을 던지며 사는 모두를 응원해 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SNS에 두고 온 오늘의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