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고 싶을 때 조용히 운동장을 도세요

유수연 <믿음 조이기>

by 고희수
나를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아본다
모든 사람을 지우고 싶은 날 조용히 운동장을 도세요

이런 생각은 그만 접어두자 말하며 이런 생각은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며
운동장을 잊을 정도로 돌았다

유수연 <믿음 조이기>


망각은 축복이란 말이 있다. 기억력이 이미 안 좋은 나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옛날에 그랬잖아~’ 하고 친구가 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남에 일을 들은 것처럼 낯설다. ‘내가 그랬어?’ 하고 멋쩍게 웃고 만다.


좋았던 기억은 그렇게 쉽게 잊으면서 안 좋은 기억은 오래간다. 상사에게 갈굼 당한 기억, 친구나 연인에게 실수한 기억, 그 실수가 내게 상처로 남은 기억들 따위 말이다. 안 좋은 일은 생채기를 낸다. 상처 입은 나를 도닥이고 괜찮다고 연고도 붙여주고 해야 하는데,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내가 왜 그랬지, 자책하거나 하면서 계속 그 위로 상처를 덧낸다. 그럼 흉터가 되고 만다.


정신의학에서는 이걸 반추한다고 한다. 소가 여물을 한번 먹고 위에서 다시 꺼내 다시 씹어 먹듯 이미 지나간 기억인데 소화해서 넘기고 똥으로 싸버릴 나쁜 기억을 다시 꺼내 씹는 것이다. 똥 같은 새끼! 똥 같은 말! 하고 시원하게 배설을 해버려야지 그러지 못한다. 똥 같은 걸 자꾸 꺼내 씹어버려서 기억의 용량이 꽉 차버린 것 같다. 좋은 기억은 다 어디로 가버렸다.


그만 생각하자 해도 기억은 다시 떠오른다. 뇌가 불편함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가령 대화 중 내가 한 농담에 친구가 약간의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고 해보자. 그 언짢은 표정은 정말 나의 농담이 이상해서 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순간 그 친구가 배가 아파서였을 수도 있다. 그 순간에 “너 왜 그래?” 하고 물을 수 있지만, 이미 그 순간은 지나갔다. 언짢은 표정은 이미 지나간 문제고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본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 당장 뇌는 이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그 순간을 계속 복기한다. 내가 한 농담에 불편한 내용이 있었나? 말하다 너무 과하게 웃었나? 침이 튀었나?처럼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내가 타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반추는 사회적 관계를 위한 뇌의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오면서 반추는 각종 불안과 우울, 자존감 하락을 불러온다.


나 역시 그랬다. 눈치가 쌓여 터질 거 같았던 사회초년생인 나는 상암에서 1시간 걸리는 우리 집까지 매일 걸어갔다. 정시 퇴근을 거의 못하던 때였다. 하지만 한밤중에도 천을 따라 걸었다. 여기저기서 묻혀온 눈치와 불편함, 수치심을 어떻게든 떨구고 싶었다. 떨구고 싶어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떠올렸다. 내 탓일까? 그 사람 탓일까? 아니 대부분 내탓이겠지 하며 꼭꼭 씹어댔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기억에 쫓기듯 하천을 따라 마냥 걸었다.


사실 그때는 걷는다는 게 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당장 이 불편함을 해소할 곳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 그 말과 행동, 눈빛과 표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쌓여 계속 걸었다. 그만 생각해, 그만 떠올려, 그만 의미 부여해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잊히는 기억도 있었고, 잊히지 않는 기억도 있다. 시에서처럼 나를 버리고 싶은 날에 조용히 되뇌며 계속 걸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지만 여전히 반추한다. 다만 지금의 나는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상처받을 줄 알게 된 것 같다. 어른의 뻔뻔함과 변하지 않는 완고함이 이렇게 완성되는구나 싶다가도, 누군가의 말과 표정에 심하게 불편함을 느끼고 길을 걷던 나를 떠올리면 지금이 편한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운동장을 돈다. 이번에는 너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 “내가 다 맞으니까 이제 불편하지 않아” 하고 넘기다가 이 세상 모든 걸 내 위주로 해석하는 이기적 이게도 편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걷지 못할 때까지 계속 걷는다. 내가 걷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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