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하는 나

삶은 나를 뛰어넘는 도전의 연속

by 장서율

모처럼 다시 긴 휴가를 얻어냈다. 생각해 보니 1년에 한 번 가족과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올 수 있는 시간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2주 휴가도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히 3주의 휴가를 요청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상사가 먼저 3개월 단위로 3주~ 1개월의 휴가 및 출장을 가시는 본을 보여서, 이번 휴가는 8개월 만의 서울행이었지만 아주 많은 고민이 따르지는 않았다. 상사도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잘 다녀오라고 해주었다. 표면상으로는 아버지의 칠순이 있었지만, 난 정말 쉬고 싶었다. 매일 일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숨을 쉬고 싶었다. 봄날을 만끽하고 친구들과 맛난 걸 먹고 떠들고 가족들과도 오손도손 어버이날을 보내고 싶었다. 코로나도 막바지인 요즘이건만 그렇다고 PCR 검사를 생략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한 번 해 봤다고 익숙한 그 면봉 끝의 감촉이란. 이제는 아픈 게 아니라 지겹다고 해야 하나.


원룸 아파트의 집 단속을 하고 택시를 얻어 탄 출국일 저녁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꽤 오랜 부재에 냉장고를 미리 비워두고 마지막 남은 사과 한 알로 저녁을 때우고는 비행기 안에서 요기를 할 참이었다. 밤 11시 출발 비행기지만 나는 8시부터 수속을 시작했다. 서류가 미비해서 탑승하지 못할 거라는 지상직 직원에 말에 화를 내는 사람, 단체 여행객 중에서 PCR 양성 문제로 낙오된 사람, 큐코드 - 한국 입국 시 자가 격리 면제를 위해 검사 서류 등을 등록해 받는 QR 코드- 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영어 사이트의 부재로 욕을 해대는 외국 사람... 공항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코로나가 남긴 절차들은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면세점 구역으로 이동하자 이제는 샵마다 줄을 서 있는 풍경이 낯설다. 엄마에게 드릴 화장품을 고르려고 하니 고르는 것마다 품절이요, 아버지 사다 드릴 양주를 사려고 보다 보니 줄이 너무나 길다. 결국 기내 면세점에서 구매를 하기로 하고, 두 대의 노트북을 꺼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무사히 기내 좌석에 안착했다. 배가 고파 면세점에서 급히 산 다크 초콜릿 두 조각 정도를 베어 물었을 무렵, 승객이 모두 탑승해서 탑승구를 닫는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 그 후로 약 1시간, 여전히 비행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국적기이기에 한국어로 방송은 계속 나오지만, 외국인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급기야 내 옆에 앉은 외국 여자애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출발 공항에서 보안 검색대에서의 스캐닝이 제대로 안 되었으니 비행기가 뜨라는 사인을 주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밤 12시가 넘어, 기장이 당황한 투로 모든 승객들에게 짐을 들고 내렸다가 다시 한번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달라는 방송을 했다. 안대를 끼고 잠에 들었던 사람들은 투덜대며 - 나는 아연실색하며- 기내 캐리어를 내려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설마, 비행기가 뜨지 않는 것일까 두 번 세 번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아침에 공항에 나오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배가 고파 멍해진 나도 그 줄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새벽 1시가 넘어 비행기는 이륙했다.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을 먹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이었다. 잠은 조금이라도 자야겠는데 싶어 이코노미석임을 무릅쓰고 스튜어디스에게 진토닉을 요청했다. 단번에 그녀는 내 기분을 눈치채고 대답해준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술꾼인 나의 혀에도 꽤 센 비율의 진토닉을 원샷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두 시간 뒤 잠에서 깨어 기내 면세점 책을 뒤적여 양주를 주문했다. 나는 진정 술꾼인가.. 이대로 괜찮은가.. 를 되뇌다 다시 두 시간 정도 잠에 들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도착을 준비한다.


8개월 만에 다시 밟은 인천 공항. 이제는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곳. 여전히 서류와 큐코드를 준비하지 못해 줄을 서서 욕을 하는 승객들과, 당황해하는 직원들. 시시각각 변하는 지침들 속에 항공산업은 잘 버텼다 싶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유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고 있다. 면세점들은 최소 2년 정도는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버텼어야 할 것이고, 항공사는.. 화물 수화기 수송으로 먹고살았을 것이다. 수많은 지상직과 승무원들이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오늘 비행기에서 겪었던 일은 내 구역 담당 스튜어디스도 나도 처음 듣는 일이라며 황당해했달까.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매년 비행기를 탔던 역마살 가득한 나였던 듯하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 집이었다. 이번 휴가를 계획하면서 수많은 일정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건 하나, 드라마와 미디어의 영향을 받은 '나의 해방 일지'를 쓰고 '서울 체크인'이라는 이름의 브런치 매거진을 발행하리라는 것이었다. 올해 들어 밤이 되면 늘 생각을 했다. 내가 진짜 두려운 게 무엇인지, 왜 잠들지 못하는지, 나의 지속적인 열정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아무런, 정말 아무런 변화 없이 일에 매일 것만 같아 진정한 나를 찾았던 순간들. 나이 들어감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기에, 그런 시간을 겸허히 여기기 위해 매일 돈을 벌지만 계속해서 내 본질을 찾아가려는 노력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영 하는 괴물이 될 거 같아서 그랬다. 생각만 하고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던 그때. 서울에 오자 모든 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바뀌자 내 의식도 명확해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용돈 박스를 선물해 드리고 좋아하는 순대랑 막걸리, 평양냉면을 맘껏 먹으며 즐거운 어버이날과 생일을 보냈다. 나의 생일은 어버이날 다음날이라 늘 그냥 그렇게 묻히기 마련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고 우쭐해지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생일 선물을 달라고 근 10년 만에 졸라보았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해줬음 된 거 아니냐고 얼버무렸지만 사실 나는 엄마의 물김치랑 양념 꼬막이 그리웠던 터라, 웃고 넘겼다.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은 여전히 나에겐 어렵고, 그 반대의 경우인 엄마는 늘 내게 받을 게 있는 사람처럼 요구를 한다. 예컨대 30만 원의 용돈을 드리면 나는 100만 원이 필요하다, 하는 식이다. 적절한 선이 필요한데, 그 선을 긋는 데 내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는지 엄마는 알까 싶다.


그리고 어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여기까지 오는 하늘길도 복잡했건만, 10일 화요일이 되자 엄마는 나에게 하나의 심부름을 시켰다. 십수 년 전 집안싸움으로 틀어진 친척을 대신 만나 달라는 이야기였다. 집안끼리 돈문제가 얽혀있는 것 같아서, 내가 덤터기 쓸까 봐 만나기 싫었다. 연좌제의 시대도 아니지만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외치고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척은 당사자인 엄마는 싫지만 나는 만나고 싶어 했고, 내 마음은 싫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친척과 통화한 후 그녀 - 사촌오빠의 처- 의 목소리가 진정성 있어 보여 기어코 만나게 되었다. 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보기로 했는데 은근 긴장이 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채가 잡히면 어쩌지, 대신 물세례를 받으면 어쩌지 싶어 덜덜 떨렸다. 근처 마트에서 새 옷을 사 입고 급한 대로 손톱을 다듬고 자리에 앉았는데, 저 건너편 테이블에 중학교 때 친구가 보였다. 그 친구는 이 동네 살지도 않는데, 반갑고도 왠지 안심이 되었다면 나 많이 긴장한 걸까. 친구의 일행이 있었기에 양해를 구하고 친구에게 서로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만나자고 하며 친척과의 약속시간을 맞았다.


뭔지 모를 위화감에 얼굴을 보니, 50대에 접어든 부부가 눈에 보인다. 사촌 오빠의 얼굴에 큰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그는 조금은 화가 나 있었고, 새언니는 나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가씨 결혼 생활은 어때요, 애는 아직 없어요?'

'저.. 이혼했어요..'


그리고 나선 마치 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나는 내가 그 후 한 시간 동안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각선으로 반대편에 앉아있었던 내 친구는 나를 보며 당황해했고, 새언니는 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놓인 내가 제일 싫었다. 나를 이 상황으로 몰아놓은 엄마가 미웠다. 그리고 아직도 이혼이라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내가, 끊어내지 못하고 착한 아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내가 - 너무나도 갑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려준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그 상황에서 오래도록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나름의 고해성사를 한 것일까. 새언니는 힘내라는 말을 하며 자리를 떴다. 그래도 결혼식에 초대하지 못한 내 몫의 인사는 한 것 같아 시원했다.


친구는 나보고 혹시 몸이 아파서 그런 거냐며 그게 아니면 됐다고 위로해 주었다. 집안일이 창피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정신이 나가 있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또 다른 사촌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랑 통화하다 보니 아직도 덜 울었는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는 내가 어릴 때 울 윗집에 살아서 어린 시절의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때문에 힘들어서 괴로워하는 날 볼 때마다 네가 살려면 그녀의 요구들을 끊어내야 한다고 말해 주곤 했었다. 엄마는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살았고, 남들에게 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기에 그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고 언니는 말했다. 그냥 나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니기에, 그녀와 사는 게 힘들어서 해외 생활로 도피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생활이 1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내 나름의 독립과 자립을 이뤘고, 덕분에 많이 아팠지만 그만큼 단단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버텨온 내 삶이 지치고 힘들었을 때, 이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삶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게 여러 대외적인 핑계를 댔던, 이번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좀 더 나일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소극적인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가 되어보는 것. 일에서도 인생에서도, 가족과도 친구와도, 나는 그 연습이 좀 더 필요했고 어제의 이 경험은 내게 아주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언니와 통화하며 앉아서 대성통곡했던 벤치는 고등학교 때의 내가 힘들어하며 울던 곳에 다름 아니다. 오도카니 그때의 내가 보였다. 아직도 상처받은 내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뒤로 하고 앞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 고등학교 시절 내 곁을 지켜준 친구가 이번에 서울 온 나를 보고 해 준 말이 있다.


'과거의 너를 지금의 너와 비교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엄마와의 관계는 참 어렵지만, 나는 잘 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건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그녀는 내게 역설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삶은 모든 것을 내게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들 때 숨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손 하나는 곁에 두어 주었다. 방황 없이 나아가리라. 나를 상처 주던 이들을 멀리멀리 떠나, 나부터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그런 삶으로 걸어가리라. 푸르른 5월의 서울의 바람이 내게 속삭인다.


'이제는 행복해야 해. 자유로워져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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