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저기서도 잠들지 못하는 것
결국 모든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생각을 많이 해 보고 나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싶었다. 실제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우선순위가 매겨졌고 그것들을 해 내는 데 걸리는 시간도 계획도 잡혔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휴가랄까.
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유영하다가 가족과 함께 공간을 나누어 쓰는 것은 1년 365일 가운데 30일이 채 되지 않는데 벌써 나는 숨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아주 잠깐, 나 혼자 있는 공간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오롯이 앉아서 글을 쓰는 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나는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소모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발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축이 나를 위해 돌고 있다고 믿는 나이지만, 따라서 독자의 성향을 무시한 나만을 위한 글을 쓰고는 있지만, 서울이란 곳에 오면 나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동생의 인생에 어느 정도는 개입하며 맏이의 역할을 해 줄까를 고민하는 데 내 열정을 쓴다. 하물며,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가로질러 가며 먼 동선에도 아랑곳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하루에 약속 하나 소화하기도 어려운 나이인데 두세 건의 약속을 소화하다 보니 내 체력이 이렇게 좋았나, 혹은 사람들을 이렇게 좋아하는 나였나, 싶기도 하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선택적일 수 있어서 좋다. 해외에서 오래 살면 인간관계가 여러 차례 걸러진다. 나를 힘들게 했던 관계들을 끊어내게 되고, 끊어내지 못해서 어정쩡하게 유지했던 관계들을 되짚어 보게 되며, 그들과 함께 할 시간에 나를 더 돌아보게 된다. 동시에 참 반어적 이게도, 사람이 그리울 때는 있다. 그렇지만 서울이라는 번잡한 도시에 와서 3주 여를 지내다 보면, 사람들과의 어느 정도 유대도 확인했고, 관계 속에서의 내 모습도 정립했으니, 이제는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있다. 바로 오늘, 나의 출국일이어야 했던 날에. 건강상의 이유로 일주일 정도 출국을 미루고, 드디어 노트북을 켜게 되었다. 애증이 얽힌 관계들 속에서 사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들을 쳐내면서 적당히 융화되어가며 사는 것도 이만큼 나이 먹은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할 덕목임을 느낀다.
사람들 속의 나는, 혼자서 있을 때 내가 바라보는 나와 전혀 다르다. 자꾸 나는 대화 속에서 나의 키 자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나 여전히 잘 살아있어요, 죽지 않았어요, 잘 버티고 있어요 -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꽤 괜찮은, 성공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런 말들을 하려고 만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국, 나 자신이다. 같은 나이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각자의 고민을 나누다가도, 드는 생각은 이러하다. 겸손해져야겠다. 모든 이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 이 험한 세상에서 - 서울은 너무 빠르고, 경쟁적인 도시임이 틀림없고, 따라서 나를 무척이나 긴장시킨다 - 앞으로 살아갈 일은 막막하지만, 믿어야 할 것 또한 나 자신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시점에서 이 도시에 다시 돌아와 안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서울이란 곳에 다시 올 때마다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도,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 지금 여기, 여행자의 시점이기 때문일 거다.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 지구별 여행자. 여전히 앞일은 예측불가라, 답답해서 문의해 본 사주 철학관에서 내게 말해 준 내 캐릭터의 정의이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나 자신의 강점이자 단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 닥치고 그만 좀 받아들이시지, 냉소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너는 그냥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해 주는 절대자처럼.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스승의 말처럼. 그냥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표현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간단한 프로세스를 어렵게 생각하다 보니 베베 꼬인 인생을 한 때 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종종 사주 이야기 - 인생이 한참 안 풀리던 30대 초 나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사주/ 역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 를 했던 나의 대학원 선배가, 이번에 나를 보고 하신 말씀이, 이제는 많이 지구에 안착한 것 같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정말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 같았다면서. 혼자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면서. 함께 웃었다. 지난날의 나를 지우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름의 이유와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몇 가지 새롭고 강렬한 경험을 했다. 여전히 생경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렘이 사라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나는 천상 여행자 아니던가. 어디든 마음을 내려놓으면 있을 수 있는, 나 있는 곳이 내 마음의 고향인 지구별 여행자. 돌아가더라도 나는 이런 마음으로 또 열심히 일터에서 싸우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