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던 기억

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by 장서율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자 아무래도 좀 우울해졌다. 5월이라는 계절에 한국에 온 건 5년 만이다. 어버이날, 내 생일, 아버지 생신, 부모님 결혼기념일, 어머니 생신까지, 많은 기념일들이 몰려있는데, 일부러 내 생일상 얻어먹으러 오는 것 같아서 그랬던가. 아니면 설날이나 추석이 더 중요했을까. 뭐 어쨌든 그런 사실은 이제 중요치 않다.


9년 차 해외 생활에, 이번처럼 이렇게 오래 한국에 체류한 것도 처음이다. 재미있고 신기한 우연에 우연이 겁쳐, 매거진 첫 글에 썼던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와, 어제 또 우연히 마주쳤다면, 그것은 필연일까? 우리는 웃으며 필연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길 자신이 다른 동네에 살면서 우리 동네 사는 지인을 만나러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데, 그때마다 그 시간 그 자리에 해외에 체류하는 내가 있었다면서. 어젯밤 우리는 잠시 또 조우했다.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면, 지금의 내 위치나 상황을 잊고 어렸을 때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오랜 친구가 주는 기쁨이리라. 그리고 그런 만남의 서로의 오래된 기억들이 퍼즐을 맞추면, 한 가지 사건을 기억하는 여러 관점에 대해 깨달을 수도 있고, 잊고 있었던 내 모습에 대해서 들을 수도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마지막 회에서 염미정이 자신의 예전 일기장을 보고 깨달은 것처럼.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사랑받았고, 밝고 명랑했고,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삶의 순간이 살면서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드라마의 대사를 빌리자면 '설레는' 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중고등 학교를 5곳 옮긴 나는, 기억하지 못할, 그 어느 학교에서의 그녀와 나의 첫 만남. 내가 마치 언니처럼, 그녀를 보살폈다고 했다. 가만히 어깨를 쓸며, 위로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 나의 모습. 예컨대 그때의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위로를 그녀에게 대신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그때의 내 진심에 다른 이유는 붙이고 싶지 않다. 어젯밤 그녀의 이야기에 난, 그때의 그 따뜻함을 부메랑처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뻤다.


삶의 어떤 부분 부분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맞닦트리고, 그로 인해 원치 않는 이별들을 하고, 원치 않는 상처를 타인에게 퍼부어 주고, 원치 않게 의기소침해진 나를 보듬었던 시간들. 나의 또 다른 친구는 이전의 힘든 내 모습을 보고 이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살까 걱정했다며, 이제는 그런 모습이 많이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런 말들을 비꼬자면 한이 없고, 내가 뒤틀렸다면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상했을 텐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말들이 '내가 널 사랑하고 아낀다'는 표현으로 들렸다. 오지랖이 아니라, 조심스레 상대의 기분을 살피면서 둘만이 나누는 그런 대화들이 따뜻하고 좋았다. 앞으로도 많은 말들을 하지 않으리.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타인에게 쉽게 하지 않겠노라 작게 마음속으로 다짐해 보기도 했다.


오래된 매듭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보고 싶어도 인연이 다하면 평생 다시, 볼 수가 없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만나게 된 '예정에 없던' 이들에게 (특히 나의 첫사랑에게) 심심한 사과를 하고 떠나고자 했다... 그는 흔쾌히 말했다. 오래전 일이면 상관없다고. 그럼에도 마음이 쓰였던 건 나의 예민함일까 혹은 이기심일까. 가만히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나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은 없다. 너무 많은 생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앞으로는 마음에 그런 응어리지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그때그때 알아차리고, 투명하게 용감한, 그런 내가 되어 적절히 표현하자고 다짐했다. 삶은 왜 이렇게 살 수록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을까. 나는 왜 이렇게 작디작은 존재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짓밟히지 않기 위해 나를 포장하며 살아야 하나. 이제는 좀 더 자란 내 마음이 대견하고 고맙다. '어렵게 어렵게' 뗀 발걸음으로 빛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자. 염미정의 대사처럼 '해방 일지'에 적은 문제점들을 알아차림만으로 많이 온 것 아닌가. 화두는 화두로 머물러 그 자리에서 나를 더, 찾아보기로 한다. 나의 길을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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