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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Feb 26. 2023

눈부신 토요일 이른 낮

내 찬란한 덕질의 역사

눈부신 토요일 이른 낮에 외출을 하려고 옷장을 뒤지다가 제일 눈에 띄는 티셔츠 한 장을  꺼내어 입는다.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그린 캐릭터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티셔츠다. 자연스럽게 손에 움켜쥔 에코백도 여러 번 내한 공연을 갔던 가수가 내가 사는 곳에 내한했을 때 구입한 '라이브 굿즈' (아티스트의 공연장에서 판매하는 머천다이징 제품을 일컫는다. 한국에서의 요즘은 공연할 때 들고 흔드는 응원봉이 각 아티스트 팬덤의 상징이 되었지만, 20여 년부터  내가 다닌 공연장에서 팔던 라이브 굿즈는 아티스트가 디자인한 많은 각양각색의 제품들이 있었다. 이건 천천히 썰을 풀기로 하고, 그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 티셔츠가 아니었나 싶다.)이다.


요런 에코백! 좋아!


돌이켜 생각하면 예전이고 지금이고, 나의 옷장 서랍 속에는 나름의 사연을 간직한 - 주로 공연장 앞에서 구입한 - 라이브 굿즈 티셔츠들이 꽤나 많다. CD나 화보 다음으로 많이 콜렉트 했던 것인데, 나름 굉장히 실용적인 템들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티셔츠를 디자인한 아티스트는 일본인이었기에 그의 공연을 보러 가려면 현해탄을 건너야 했다. 따라서 모든 공연들마다  시간적이나 금전적 여유, 그리고 열정이 없었다면 감히 갈 수 없었던 곳들이다. 티셔츠들은 그런 공연들마다 간직하고 싶어 구입한 전리품들 같지만 10년 20년 지난 후에도 아주 가끔씩 그 시절의 빛나던 나를 기억하게 해주는 고마운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런 덕질에 나를 빠지게 해 준 선을 넘는 최초의 기억은 바로 이거다. 매체로만 만났던 아티스트의 실체를 만난 경험. 그것이 없었다면 길고 긴 내 덕질의 역사는 시작되지 않았을 거다.


어쩌다가 일본인 아티스트에게 처음 빠졌느냐고.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J pop이 단연 대세였다. 한국에는 없던 장르의 음악들에 귀가 틔였던 건 그때 내가 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G라고 하는, 지금은 은퇴한 이 아티스트의 음악을 이해하려고 나는 한 땀 한 땀 바늘에 실 꿰는 심정으로 일본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종로 모 어학원에서 한 달 문법을 배운 것 말고는 거의 수업 사이사이 쉬는 시간마다 사전을 뒤지며 단어를 외워나갔다. 대학교에서 다른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일어일문학과를 택했다.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우월한 문화를 맹목시 하기 전에,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하지만 공부와 별개로 대학 생활 내내 매진한 또 다른 것은 아르바이트였다. 고등학생 내내 이 아티스트의 공연에 가보는 게 나의 목표였기에 돈을 모았다.


동호회에서 만난 덕메 (덕질 메이트) 들과 주말에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최초의 덕질 여행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의 세 개 도시를 아우르는 2주간의 여행계획을 세웠고,  지금은 나이 제한 때문에 살 수 없는 JR 패스도 구입했다. 이 패스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무제한 일본 철도의 모든 열차를 사용할 수 있기에 신칸센을 타고 도시 사이를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6번의 공연을 보기로 예정된, 아티스트와 함께 움직이는 투어 동선의 계획을 거다. 지금이야 트위터 같은 SNS에 아티스트들이 타는 비행기 편명 정보까지 판매되는 정보 홍수의 시대이지만, 천리안과 나우누리가 존재했던 그 시절에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는 실물을 영접하는 건 순전히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렇게 나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하는 신칸센 플랫폼에서 G와 마주쳤다. 그건 우연이었다. 덜덜 떨면서 서툰 일본어로 나를 소개하며 한국에서 온 팬이라고 하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악수를 청해 주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인물이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 아주 생경한 경험이다. 나는 그에게 공연장에서 스태프에게 건네려던 선물과 팬레터를 건넸다. 돌아서려던 순간에 내 친구가 외쳤다.


'사인받아!'


지금으로 치면 포카 (포토카드)가 다행히 지갑 속에 있어서 사인해 달라고 사진을 건넸다. 매니저가 막아섰는데 그는 그 손을 가볍게 제치고 사인을 해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에게 그가 건넨 잠시의 친절은, 창피하지만 한 시간 내내 나를 설레게 했고 울게 했다. 행복해서 울어본 경험이 많지는 않은데 그때가 가장 강렬했던 것 같다. 조금의 선을 넘어선 친절, 조금의 선을 넘어선 노력. 거기 그 자리에 그 여행을 하려고 나는 몇 달 치 용돈을 모았던 걸까. 아르바이트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삶의 경험들을 했었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때의 만남 이후로 나는 그 한 번으로 끝낼 수도 있었을 공연 원정 여행을 대학 생활 내내 계획해서 갔다. 7-8년쯤 후에 그 아티스트가 은퇴할 때까지였으니까 나의 20대를 지배했던 건 G를 만나 공연에서 함께 호흡하기 위해 노력한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선을 넘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나도 너의 손을 잡을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밸런스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것을 착각하지 않고 지켜나간다면 그리 많은 불협화음이 생겨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주는 것보다 더 바라면 불상사는 반드시 일어난다. 모든 전쟁이. 모든 말다툼이 그런 사소한 감정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들 아닐까. 많은 선을 넘지 않고 시소를 타는 팬덤은 차라리 아름다운 것 같다. 무조건적으로 주고 무조건적으로 받되 실제의 생활 속에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충족되는 것은 서로의 판타지일 뿐. 세상에서 이렇게 선을 넘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누군가에게 받을 기대 않고 무조건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덕질뿐이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도 자신으로서 잘할 있는 일을 찾는다. 아티스트가 인기를 얻을수록 아이러니하게 나도 그에 걸맞은 자랑스러운 팬이 되고 싶은 호승심이랄까. 그와 거의 유일하게 함께 시간을 보낼 있는 콘서트에서의 일체감은 그런 노력의 동력이 된다. 경험이라는 강렬할수록 잊어렵고, 3-4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노래 한곡 한곡 속에서 나는 지난 20대 초반의 기억들을 본다. 그것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노래를 듣는 동안 곁에 사뿐히 내려앉아 이야기를 건넨다. 다정하고 날카롭고 아름답지만 슬픈 삶의 이야기들을. 외로웠던 순간들에 곁을 지켜준 음악의 힘을 나는 여전히 지금도 믿고 경험하고 있다. 내 가슴속의 설렘이 계속되는 한 기록하고 싶은 순간들을 적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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