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비 내리듯

이유 없는 감정들은 (수정본)

by 장서율

때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고1의 봄에, 태어나서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학을 왔을 때였다. 마음속 이야기를 터놓던 친구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음악이었다. 낡은 시디플레이어를 자습 시간에 꺼내 들으며 펼치기 싫어하던 정석 책의 제일 첫 부분 '집합' 챕터만 뭉뚱 그리며 서성이던 나날 들 중에.. 갑자기 눌러두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트린 것이. 생각보다 너무 크게 터져버린 소리에 여학생들만 모인 반의 몇몇 친구들이 내게 달려와 나를 안아주었지만, 내 마음은 어두운 거리 속을 헤매듯 멍하기만 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에 이름 붙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나를 토닥여주던 친구들에 대한 감사함도 모르는 채, 생각에 잠기던 그때에.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자율 학습 중이던 교실은 나로 인해 아주 잠깐, 적막감에 휩싸였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내가 세수를 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하얀 스프링 노트를 뜯어 사인펜으로 꼭꼭 눌러 담은 시 한 편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다음과 같은 시였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 비 내린다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이 슬픔은 무엇일까?


속삭이는 비 소리는

대지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 내리는 노랫소리여!


역겨운 내 맘속에

까닭 없이 눈물 흐른다

웬일일까! 배반도 없었는데?

이 슬픔은 까닭이 없다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 폴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보내는 이의 이름은 없었다. 시를 훑어내리는 동안 어떠한 감흥도 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시간과 마음을 내어 시 한 편을 보내준 친구의 배려만은 감사했다. 나는 그렇게 감정이라는 녀석의 홍수를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 수험 생활 내내 그 '둑'이 터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댔다. 누군가가 그때의 시절도 돌아가 나에게,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들을 느껴보아야만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칭찬받는 아이이기만 하려 했던 내 학창 시절에 내가 나를 제어하고자 고안한 몇 가지 감정 제어법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그 후의 몇십 년을 지나오며 나는, 자기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상태의 내가 가장 무력해짐을 배웠다. 그건 살면서 알지 못하던 감정들을 느끼면서 당황했던 순간들을 포함해, 가장 그와 내가 아름다울 수 있던 사랑의 순간과, 수치심의 순간과, 배신의 순간들 속에서 경험한 새로운 '나와의 만남' 속에서였다. 내가 가졌으나 알지 못했던 강력한 힘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발현되기도 했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에서 인생의 지혜를 떠올려내기도 했으며,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길이 좌절되었을 때 차선을 선택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어떤 순간의 감정들은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야 알 수 있기도 했고, 위의 시에서처럼 실체를 몰랐기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던 '그것들' 때문에 나만이 아는 괴로움 속에서 몇 년을 살기도 했었다.


나 자신의 감정을 마주 보는 일은 그래서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감정들을 타인과 경험하고 교류하는 일은 사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겪은 마음들은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이제는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나 마음에 비가 내리는 날에, 책상 위에서 엉엉 울던 단발머리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날에는 이 시를 적어 주었던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은 마음의 거울 속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내가 되었음에 감사한다. 갑작스러웠던 이별 앞에서 사랑도 미움도 느끼지 않으려 정신없이 달렸던 나날들 속에서, 상처받은 내 마음을 알면서도 바로 봐주지 않았기에 괴로웠음을 이제는 아니까. 슬픔과 아픔의 심연에 다가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배웠으니까.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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