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요한 부분을 깨닫게 해 주는

아주 사소한 계기들

by 장서율

평소와는 다른 주말 아침을 맞았다. 동문 선후배분들과 근거리로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 장소에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사고 회로는 어제 미리 가방을 싸 둔 것에 더해, 골프채를 자연스럽게 챙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골프채를 들고 차가 아닌 버스를 탄다는 건 상식 밖이었으나, 우등 버스이고 늘 가던 코스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버스 출발 25분 전에 도착해 보니 선배님들이 오늘은 골프가 아닌 근거리 식도락 여행을 떠나기로 하지 않았냐며 하신 말씀을 듣고 머리를 한 대 가볍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뭐에 정신이 팔려서는 이랬을까.


골프채를 들고 도보로 오래 이동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행히 버스가 오기 전 근처에 있는 선배님 댁 수위실에 그 커다란 짐을 떨구고 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숨이 차도록 뛰어서 다행히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정신이 몽롱했다. 한 주 동안 숨이 차게 일을 해 왔지만 온전한 나의 시간 속에서 이렇게 허우적 대는 내가 문득 한심해졌다.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한데 일은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어제도,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친한 동료의 송별회 약속이 저녁에 잡혀 있었다. 고맙게도 집이 근처인 그 동료가 나를 태우러 운전해서 왔다. 약속 시간은 다녀오는데 이메일은 넘쳐나고, 노트북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가기 싫었지만 결국 급한 견적이 지연되는 바람에 노트북을 들고 그녀의 차에 올랐다. 저녁 자리에서 일하기 싫어서 차 안에서 이메일을 쓰는 나를 보고 (이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6월 초에 1주일 간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조차, 아침마다 일어나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회사 노트북을 꺼내 한숨을 쉬며 한두 시간 이메일을 확인하고는 했었다. 결국 휴가지에서 그녀는 사표를 냈다.) 동료는 화를 냈다.


'뭐 하나는 내려놓으라'라고.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다고.


일도 취미도 사람 관계도 다 하려고 하니까, 결국 나를 돌아볼 시간도, 모처럼 찾아온 오늘 이 소풍 같은 하루도 커다란 짐을 들고 가는 바람에 망쳐버릴 뻔하지 않았나. 물론 나를 고용해 준 회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직원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인생을 모두 갈아 넣어 회사에 충성한다고 해도, 내가 고용주에게 있어 평생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훨씬 내 삶이 더 소중해진다.


선택과 우선순위를 취하는 것은 이제 필수인 나이가 되었다. 내 체력도, 시간도 한계가 있으니까. 주변에서 이런 계기를 만들어주는 이들에게 참 감사하다. 아니면 나는 아직도 내가 20대인 줄 알고 경주마처럼 주변을 못 본채 달리다가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나의 20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가 있었다. 이불킥 하고 싶은 순간들도, 되돌릴 수 있다면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시간들도 있었다. 그때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이나 사건들로 찍어둔 점들이 선을 만들고, 몇 개의 선이 이어져서 지금의 내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회사 생활도, 가까운 미래에는 또 다른 선으로 이어지는 점들이 되겠구나 생각한다.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건들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삶에서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제와 오늘처럼 사소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상처받았다고 내 껍질 속에 웅크려있기만 해서야, 밖에 나와 소통할 수 없다. 힘들어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은 움직여 보아야 나중에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지나온 발자취를 볼 수가 있다.


모처럼 나의 인생이 기껍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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