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연재에서 홍콩 관련 이야기를 썼을 때는 즐겁고 성취감 있는 이야기들이 대다수였다. 새롭게 하는 경험, 좌절이 있어도 금방 일어날 수 있는 10대의 힘,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일본에 관련된 추억들을 곱씹어 보자면 한 가지의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고 산재되어 있는 느낌이 강하다. 대부분 기억 속 어느 한 시기에 고착된, 아픈 이야기들이 많고 실패한 적도 많다. 일본은 내가 힘들고 길었던 (5번의 전학을 거친) 중고등학교 시절에서 벗어나 위안받고 방황하려고 찾은 곳이서 그런가. 일본 열도를 누비면서 여행하고 경험했던 시간들은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있다. 그리고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참 아이러니 한 것이, 내가 처음 싱가포르로 이직할 때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게 일본어 능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십여 년 살다 보니 중국어를 더 잘했어도 좋았을 것 같기는 하다.
엊그제 금요일에 일본에서 방문한 고객분과 두 시간 정도의 비즈니스 미팅이 있었다. 해당 어카운트의 직속 담당자는 내가 아니지만 그를 가이드해 주라는 팀 리더의 요청 사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입인 담당자와 나는 미팅이 픽스된 후 2주 간, 꽤 여러 번 사전 준비를 거쳐 여러 장의 피티를 만들었다. 보통 해외 출장을 오는 일본인의 경우, 대부분 영어 소통이 가능하신 편이다. 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억양이나 느낌은 지우기 힘들다. 그것은 한국인의 경우도 그렇고, 중국인의 경우에는 R발음이 더 도드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싱가포르인의 영어는 일상생활에서 접하지 않았다면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이기는 하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나의 영어 발음은 이 모든 억양들의 이합집산일 수도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가늠하기 힘든 영어를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동남북 아시아에서 다국적인이 영어로 소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기 능력보다도 듣기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말하는 속도, 억양, 제스처, 문화, 그리고 뉘앙스가 너무도 틀리다. 나는 그래도 내가 일본어 순차 통역을 몇 년 해 보았고, 일본인 고객들을 상대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들의 'between the lines'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비즈니스 체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각설하고, 그는 일본의 주류 제조 회사에 근무하는 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에게 고객사 주류회사의 생맥주 품질 관리를 가장 잘하면서 파는 곳이 싱가포르 어느 식당이냐고 물었다. 그는 '좋은 질문이네요' 하면서 웃었다. 그 순간 나는 15년쯤 전 잠시 건강 문제로 직장을 쉴 때, 일본여자와 결혼했던 친척의 식당 오픈일을 도우면서, 일본에 있었던 식당 바에서 이 회사 생맥주 관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맥주 디스펜서랑 노즐 관리법을 알려주었던 그 제조 회사 영업 사원은, 자사의 여러 주류를 납품하는 담당자였는데, 나중에 식당 가오픈을 했을 때 캔 맥주 한 짝을 선물로 사들고 손님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가오픈 기간 동안 홀이랑 바 매니저를 했던 나에게, 이것저것 자사 제품으로 만든 음료들을 시켜서 그 품질을 체크하려고 했었던 거였다. 선물로 가져온 캔맥주 한 짝조차도, 식당에서 판매하면 우리도 어느 정도 이익을 보고 자기들도 제품을 파는 격이어서, 과연 商売人間 (쇼바이닝겐, 일본에서 비즈니스에 강한 이들을 일컫는 말. 그들은 뭐든지 웃는 얼굴로 잘 판매하는 인간들이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 생맥주 탭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는, 노즐 청소한다고 남은 맥주를 아까워서 마셔버리곤 했었는데.
일본에서의 식당 근무는 하루 12시간의 고된 경험이었다. 그렇잖아도 후텁지근하고 습기 많은 일본의 여름, 8월 초에 도착했던 일본 남쪽의 그 작은 도시에서, 나는 그 당시 6개월 동안 직장을 쉬면서 너무 생각이 많아진 나 자신을 달달 볶았다. 거기에 가기로 했던 건 뭐든 다시 시작해야 할 거 같아서였다. 서른 즈음까지 열심히 살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놓고 난 후의 나는, 내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몸소 체험한 셈이었다. 5일 동안 세수를 하지 않은 적도 있고, 아침에 잠들고 밤에 깨는 생활을 했다. 그때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 느낌이어서, 자포자기 상태로 점점 살도 쪄갔던 것 같다. 그래서 맞는 옷이 트레이닝 복 정도밖에 없어졌을 때 일본에서, 잠시 식당 오픈일을 도와달라는 친척의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망설이시며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6개월 동안 면접도 이력서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더 이상은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할 수 없이 일본으로 향했다. 그리고 임시라지만 그쪽에서 얻어 준 컨테이너 가건물로 지은 주택의 2층 원룸에서 처음 잠을 자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8월의 일본은 폭우가 몰아치는 밤이 많았고 유리창은 까만 어둠 사이로 거세게 흔들렸다. 가구도 뭣도 하나도 없던 그 방에서 나는 캐리어 안에 싸 들고 간 요가 매트 한 장을 놓고, 비행기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노트북에 저장해 둔 영화 몇 편을 계속 돌리면서 설핏 잠이 들고는 했다.
그리고 그 후 3개월 동안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잠을 잤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스탭 밀을 먹고, 점심 장사 준비를 하고, 치우고 2시간 휴식 뒤에 저녁 장사 준비를 하고, 청소랑 마감을 하고 나면 밤 10시는 되는 거였다. 거기서부터 뭔가 개인 시간을 가지려고 해 봐도, 밤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일본의 소도시, 거기에 주택가는 밤 10시면 칠흑 같이 어둡고, 지나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나는 방에 돌아와 반신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멍하니 있었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생각해 볼 겨를이 많지는 않았다.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으니까. 나는 주 6일을 근무했고, 남은 하루 휴일에는 중고잡화점 같은 데 가서 급한 대로 세간살이를 사들였다. 탁자랑, 가스레인지랑, 형광등이랑, 도시 가스도 연결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서 집에서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시간이 없었다. 식당에서 일할 때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접객을 해야 했다. 한국인은 일단 밥을 먹이고 일을 시키는 것 같은데, 일본은 정 없게 밥 먹다가도 손님맞이라니 별로였다. 그래도, 같이 일했던 주방이랑 홀 식구들은 먼 친척보다 내게 더 살갑게 대해 주었다. 홀에 그때의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은 여자분이 계셨는데, 식당 여기저기서 홍반장처럼 일하는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었다고 내가 그만둘 때쯤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좋았다. 나는 이민 가방에 가득 들고 간 짐의 절반 정도를 버리고 100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기 투자 비용을 고려하면 하면 안 되는 선택이었지만, '이 생활은 정말 답이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요리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내 식당을 열고자 하는 꿈도 없었다. 카페 매니저나 아르바이트와 식당 일은 다르고 또 너무 고되었다. 그 작은 방의 얼마 안 되는 세간을 도로 내다 팔면서, 형광등까지 떼어버렸다. 요가 매트를 접으면서 침대를 사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못된 길로 빠져서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와 다음 직장에 취직하기까지 2개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절에 가서 기도했다.
그리고 적어도 그다음 직장은 번듯한 외국계 회사에 입사했고, 영어, 일본어, 한국어를 고루 하는 인재를 찾고 있었기에 내가 지원한 포지션은 내 의지만 있다면 야간 박사 과정도 할 수 있는 9 to 6 job이었다. 이 직장이 내가 싱가포르로 이직하기 직전의 회사였는데, 이 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이어서 쓰기로 하겠다. 맥주에 대해 잠시 말했을 뿐이었는데, 내 마음속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똬리를 틀고 있구나 싶고, 그 힘들었던 과정들 가운데 또 좋았던 점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신기하다. 나는 싱가포르에 와서도 원치 않는 일들을 겪으며 좌절했던 적도 있었다. 그 지점들을 돌이켜 보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회한도 트라우마도 없이,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를 적을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은 굳이 나에게까지 인생에 대해 물어오는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경험에 의거한 충고들을 해 줄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조금만 더 어릴 때 깨달을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다른 내가 되어 조금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