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부르고 싶은 어느날 밤에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었던 일들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는 요즈음. 3년 반 만에 자취방에서 나와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볕이 들지 않는 방에서 있다가 보면, 참 많이 가라앉기도 울기도 했었는데, 이사 가는 집의 일조량을 받아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많이도 생각났다. 냉장고 안에 고이 모셔진 - 좋은 날 따려고 두었던 - 와인을 한 병 따고 짐을 싸기 시작한다. 아니, 짐을 싸기 전에 하나씩 두 개씩 서랍을 열어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비워지는 것들은 사진을 찍어두고 기억 속에서만 간직하기로 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절감하며, 새삼 쓸데없는 것들에 쌓여,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다는 걸 체감하며, 그렇게 정리들을 이어나갔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새로 나온 성시경의 8집 앨범을 찬찬히 들어보았다. 다소 파격적인 미디엄 템포 댄스곡이 타이틀이지만, 명불허전 그의 목소리와 곡들, 가사는 참 달콤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만의 작업을 하고 있자니,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어서, 우는 것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게 싫어서, 나만의 공간을 꿈꾸던 나. 대학 시절 내내 들었던 성시경의 1-3집을 뒤로하고, 일본에서 살던 작은 단칸방에서 받았던 서울 집에서의 소포. 그렇게 기다리던 그의 리메이크 앨범 '제주도의 푸른 밤'을 들으며 만끽한 혼자만의 자유, 꿈, 사랑, 청춘 그런 것들이, 그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기억의 서랍 속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10년 만의 앨범이라고 했다. 삶의 어떤 주기마다 선물처럼 받았던 그의 신보. 4집 '다시 꿈꾸고 싶다'가 발매되었을 때, 광화문 언저리에서 회사를 다니던 나는 일본에서의 선연, 그로부터 오랜만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었다. 6집 '여기 내 맘 속에'에 수록된 '안녕 내 사랑'을 들으면서 많이도 달렸던 것 같다. 이별을 하고 나서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안정이 되고, 근 20년 동안 꾸준히 들어서 인이 박혀버린 목소리에 안도하며, 세월을 보냈다. 간간히 발매되던 드라마 OST 가운데 '너는 나의 봄이다'가 제일 좋았는데, 그 노래를 들으면 왠지 가슴이 벅차면서 눈물이 난다. 자우림의 김윤아 씨와 더불어 한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남자 보컬, 동시대를 살면서 또 앨범을 내주시고 변신도 해 주셔서. 기쁘다. 예전에 대학교 다니면서 마주쳤던 걸 생각하면, 신기하다.
다시 술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분 술에 진심이시다. 동문의 영향인지, 원래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술에 진심인 사람 나는 너무 좋다!
노래를 들으면서 한 잔 두 잔 천천히 음미하며 들이키자니, 자연스레 이 가수와 나의 공통점을 찾는다. 같이 늙어가면서, 좋은 사람이랑 (혹은 기분 내키면 혼자서) 술 한잔 하시는 분. 술에 진심이신 이 분이 좋다. 세상에 두 명의 성시경은 없겠지만 행여 누군가를 또 만난다면, 술에 진심이고 술을 즐기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셰어 하우스 방에서 지낸 지난 3년 반 동안, 혼자만의 틀에 갇혀서,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았던 나를. 기억을 박제한 채로, 슬픔을 봉인한 채로, 회피라는 감옥 속에 기꺼이 스스로를 가둔 나를. 혼자서도 좋은 게 많다고 자위했지만 사실,
나는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그동안 너무 생각 없이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내게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하기엔 덧없이 흐른 30대 후반의 소중한 3년 여, 어떤 방향성이 없이 내 의견이 없이 그냥 현재만 유지하자며, 주변에 휩쓸리면서 지냈던 거 같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 코로나로 '폭주하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던들, 찾아오지 않았을 오늘의 평화. 안정감. 그리고, 지금 나의 틀을 깨지 못하면 점점 더 답답해질 것 같은 오늘의 마음. 이제라도 찾아나가자 싶어 움직이기 시작해서 다행이다. 오늘, 바람에서 그런 냄새가 났다. 익숙함의 냄새. 방랑자의 피를 끓게 만드는 말. 이젠 떠나야 한다는 말. 영화 '초콜릿'의 줄리엣 비노쉬가 생각난다.
그리고 술에 진심인 사람 여기 한 명 더요. 고량주 병이 이뻐서 꽃병으로 사용하고 있었네요.
순전히 병이 예뻐서 산 안동 소주 미니어처. 진저에일이나 소다수에 섞으면 술인지 모르고 술술 들어간다.
결국은 혼자 1병을 비운 나. 이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자. 안주는 수육, 방울토마토, 브리치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적절했던 최애템들. 안녕 내 방. 아무 말 없이 내 슬픔을 품어주어서,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