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당신에게, 기억나지 않는 나에게
열네 살 때쯤이었던가, 국제 학교에서 처음 배울 때, 극성맞은 엄마 (엄마에게는 그게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가 방과 후 원어민 영어 선생님을 직접 붙여 과외를 시켜주신 적이 있었다. 아마도 비싼 과외비를 내고, 학교 선생님을 초빙해서 영어를 배웠다. 흰 백발에 가까운 금발을 한 중년의 그녀는, 영어 숙어를 하나씩 가르쳤다. 예컨대 Give up, Stand up, Put away 등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Stand up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기쁜 마음에 숨을 내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어를 반복해서 익히던 어느 순간 단어들 가운데서의 규칙을 터득하고 '유레카'를 외치던 그날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세월을 돌이켜 보자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지금도 가끔씩 나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어떤 발견을 했을 때, 그날의 내 모습이 겹쳐지곤 한다.
그리고 가끔씩은 불안하고, 궁금했다. 나는 분명히 현재를 살고 있는데, 어째서 어느 순간 과거의 내 모습으로 회귀되고 있는지. 나는 그저 주어진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데,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기억 속의 보이지 않는 틈 사이에 박제되어 버린 나의 아이덴티티. 주체성. 자아.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아니, 그전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아이 었을까. 교환해서 책을 읽고 돌려받은 소설 '채식주의자'를 오랜만의 다시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내가 몇 년 전 이 책을 들고 버스에 올랐을 때 만난 지인이 내게 '채식주의 자세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설명을 하려다 관두었다. 관심사는 제각각 다르기도 하고, 나보다 열몇 살 어린 그의 세상을 내가 다 알 수도 없으니까. 소설 속 영혜는 82년생 김지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유년기를 가진 존재다.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삼켰어야만 했을 서러움이 그로테스크한 통쾌함, 날것 그대로지만 이상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기실 내성적이어서 글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했던 아주 어린 시절의 나. 상담을 거치면서 발견한 내 안 깊숙이 숨어있던 상처 받은 내면 아이. 매일같이 비슷한 내용의 일기를 A4 용지 가득 채워가며 대상을 알 수 없는 서러움을 토해 내던 나. 나이 마흔이 되어 알게 된 내 안에 가장 큰 결핍. 몇 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의 영혜라는 인물이 마냥 측은하고 예뻤다. 그녀가 식물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은 사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삼킨 모든 어둠을 정화하려는 의지는 아니었을지 싶어 나도 어딘지 모를 터널의 끝자락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터널을 지나 빛을 마주한 지금은 알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오래 헤매고 갈망했던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지켜내지 못했던 것들을 기꺼이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을. 정신없이 찢겨나간 마음의 조각들이 서로 모여 다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지금의 내가 다시 읽은 오늘의 책 한 권은 참 따사로웠다. 소설 속의 복잡한 비유나 심상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한강 작가님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그게 참 유려해서 매혹되곤 한다. 세상 모든 욕망에 평범한 얼굴을 하고 계시면서 어떻게 이런 상상이 나올 수 있을까, 실로 문학의 힘은 위대하구나,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며 전투적으로 일한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