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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각시 Jan 16. 2020

언니의 세뱃돈

[서른, 무직입니다만 03]

서른 무직입니다만
서른 살 백수. 시험용 글쓰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에세이.





다음 주면 민족의 대명절 설이다. 이맘때만 되면 결혼한 둘째 언니에게서 연락이 온다. 내겐 언니가 둘이다. 네 살씩 차이가 나서 큰 언니는 나보다 8살이, 작은 언니는 나보다 4살이 많다. 


둘째 언니가 결혼한 뒤로 우리 사이 카톡방은 잠잠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언니가 결혼을 하고 따로 살게 되면서 자매 관계도 꽤나 데면데면해졌다. 오랫동안 한방을 나눠 쓴 나의 룸메이트는 사라졌고, 언니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지며 대화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명절과 내 생일 때면 어김없이 카톡에 ‘빨간색 숫자 1’ 표시가 떴다. 축하와 덕담보다도 언니는 1년에 두세 번씩 이날을 핑계 삼아 두둑한 용돈을 보냈다.


20대 초반에는 이러한 공돈이 마냥 반가웠다. 둘째 언니는 빠른 년생이라 나이로는 네 살이 많았지만 학년으로는 5학년이 높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거의 바로 취업한 언니는 모두가 알만한 대기업에 들어갔다. 나이로 봐도, 경제적 여유로 봐도 작지 않은 금액을 받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점찍어둔 옷이나 화장품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는 데 거리낄 것 없이 이 돈을 썼다.


 

나는 언니의 세뱃돈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다.


20대 중반이 되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할 땐 언니의 세뱃돈이 생명수와 같았다. 면접을 대비해 메이크업을 받아야 할 때나 다른 지역으로 시험을 보러 가게 돼 KTX를 타야 할 때 엄마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비상금처럼 꺼내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한두 살 먹을수록 언니의 세뱃돈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 나이 먹도록 언니에게 용돈을 타내는 것이 면구스러웠다. 이때부터 언니가 돈을 줄 때 “정말 괜찮은데…”라는 말을 고맙단 말에 어미처럼 붙였다. 스스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속으론 ‘내년엔 이 돈을 안 받을 거야. 그렇고 말고…’라고 되뇌었다. 내년은 내후년으로, 내후년은 3년 뒤로 밀리고 밀려 나는 서른이 되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면 언니는 내가 돈에 쪼들릴 때마다 그걸 귀신같이 알고 도움을 줬다. 카공족인 내게 커피 기프티콘을 주고 무료티켓이 생겼다며 영화표를 보냈다. 나의 미안함을 사전에 차단이라도 하듯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별거 아니라며, 자신에겐 필요가 없다며 건네곤 했다.  


내 30년 생애사에 언니는, 먹고 사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같은 반 남학생 두 명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 그 근처 놀이터 곳곳에 나에 대한 낙서를 해놓은 것이다. 남을 모욕할 때 빠지지 않는 소재인, 섹스나 똥 등의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울거나, 똑같이 그 남학생들에 관한 욕을 쓰는 것 말고는(그것도 내가 사는 아파트에!) 대응책을 몰랐던 나를 두고 언니는 전 학년 연락처가 담긴 학교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두 남학생 집에 전화를 걸어 당장 이 낙서를 지우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고 ‘개지랄’을 했다(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다). 나에 대한 모욕적인 글들은 두 남학생의 엄마에 의해 지워졌다.


"누가 내동생 괴롭혔냐" 언니는 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고3 때에도 언니는 내 편이 돼줬다. 우리 집엔 컴퓨터가 한대였는데 큰언니는 내게 '고3 프리패스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인터넷 강의조차 마음껏 들을 수 없는 상황이 서러워 방문을 쾅 닫고 소리 내 울었다. 그때 둘째 언니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내게 다가와 나를 위로하는 내용의 쪽지를 건네고 나갔다.


야속 시간 탓에 곧 있으면 서른의 설을 맞이한다. 언니는 또 별일 아니라는 듯 세뱃돈을 건넬 테고, 나는 또 “정말 괜찮은데...”라고 말하며 돈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돈으로 조금은 덜 구차한 한 달을 보낼 것이다.


초등학생 때 “우리 언니 6학년이거든?”이라는 말은 친구들 사이 기싸움을 끝내는 마법의 표현이었다. 6학년 언니의 존재만으로 그 동생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1학년에게 6학년은 학교의 제일 윗 선배고, 8살에게 13살은 너무나도 큰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게는 언니가 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6학년이던 언니가.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 서른넷인 언니가. 지난한 취업준비 생활 속에 든든한 지원군이 내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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