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장소 1 고속버스터미널역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질색이다. 내게 가장 안 맞는 곳은 롯데월드, 다음으론 사람이 많고 복잡한 지하철 환승역일 거다. 그러나 거의 항상 사람이 득실득실해도 싫어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바로 고속버스터미널역이다.
고속터미널역에 뭔가 남아있다. 특히 3호선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는 구간에. 엄청나게 좋아했던 사람과 처음으로 단 둘이 함께 했던 공간이라 그렇다. 그때 내게 좋아하는 마음이란, 한 정거장이라도 더 함께 하려고 지하철을 돌아가는 마음이었다. 그 사람과 지하철을 더 타고 싶어서 내가 돌아온 곳이 고터다.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다. 어떤 강렬한 순간의 빛과 소리와 냄새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때 우리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잖아, 그때 창에서 빛이 어떻게 내려왔고 바람을 타고 은은한 무슨 냄새가 났어...그런 묘사들을 나도 하고 싶다. 그때 나와 그 사람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고 이런 얘기를 했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환승역까지 오는 상가에서 무슨 냄새가 났고 어쩌고 저쩌고. 그러나 이 모든 건 내 상상이고 사실 난 그 짧은 순간의 디테일마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란히 앉아 깔깔댔던 하행선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7호선 앞에서 헤어졌던 경로와, 그 시간만으로 너무 충만해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갔던 마음만이 기억난다.
나만의 추억일 테지만, 추억이란 정말로 신기하다. 지난주에 양재에서 건대까지 이틀 정도 출퇴근을 할 일이 있었다. 출근시간에도 퇴근시간에도 7호선과 고속터미널과 3호선은 너무나 붐볐다. 붐비는 환승역이 잠실이거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었으면 남들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겠지만, 그게 고터라서 난 너무나 평온했다. 아련하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했다. 지하철 역사 전체가 추억으로 꽉 차서 그곳만 가면 기분이 헬륨가스를 마신 목소리처럼 기분이 한결 격앙된다. 티백이라면 너무 많이 우려서 이미 내용물이 터지고도 그다음에 주머니가 헐었을 만큼 많이 우려먹은 추억이 아직도 힘이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편애가 아주 심하다. 전 애인과 간, 연어가 엄청 맛있었던 식당과 커피가 맛있었던 근처 카페의 이름과 위치도 기억을 못 한다. 걔랑 지하철을 탔어도 몇 번은 탔을 텐데, 환승도 여러 번 했을 텐데 어디서 어디까지 갔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걔랑 헤어졌을 때 한 친구는 나를 비난했다. 연애할 준비가 안 됐네, 그래서 걔 같이 착한 애를 이렇게 놓치네, 라고.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누굴 사랑할 여력이 아주 많이 남아있는 사람이다. 고터만 가도 알 수 있다.
어느 장소건 단골이 되어보는 게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습니다. 이제 저도 꽤 살아서, 장소와 얽힌 이야기가 더러 생겼습니다. 자주 들렀던 곳, 이야기가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써보려고 합니다. “장소라는 책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되풀이해서 씌어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일정 부분 우리가 어디서 살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라고 제가 존경하는 작가가 썼습니다. 딱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말이라 인용해 봅니다. 저를 만들어 온 공간들을 떠오를 때마다 이야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