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여성 히어로에 여성 악당. <인크레더블2>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2004년 ‘초능력 가족’이라는 서사로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인크레더블>이 14년 만에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채 돌아왔다. 오락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여성 서사를 재현하려한 <인크레더블2>는 과연 재미와 감동에 더해 메시지까지 성취해냈을까.
여성 간 대립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란 구도로 그려져 왔다. 고부갈등이나 ‘세컨드’와 ‘조강지처’의 대결은 아침드라마 속 단골소재다. “여자들은 다른 여자가 잘 되는 꼴을 못본다”며 시기와 질투가 여성의 ‘종특’인양 여겨졌다. 제사 등에 시달리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등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나 처와 첩이라는 기형적 ‘문화’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은 채 말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될 수도, 남자가 될 수도, 아이가 될 수도,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늘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여성 히어로에 여성 악당을 전면에 내세운 <인크레더블2>은 어떨까. 영화는 기성 문법에 따라 ‘여적여’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 일라스티걸과 스크린슬레이버는 각각의 서사 안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일상의 문제에 서로 공감하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고정된 성역할에 가두지 않고 ‘Girls Can do Anything’을 두 캐릭터를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남성 일변도였던 히어로물에서 여성을 전면으로 등장시켜 기성 문법을 전복한 이 영화는, 2016년에 개봉한 <고스트 버스터즈>를 떠올리게 한다. 원래 1984년에 만들어졌던 <고스트 버스터즈>는 남성 ‘너드’ 코미디물을 스토리의 축은 그대로 두되 성별 역할을 전환시켜 2016년 재개봉했다. 여기서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근육질의 크리스 헴스워스의 캐릭터가 돋보였다. ‘금발은 멍청하다’는 통념 아래 금발 미녀 여성 캐릭터에게 덧씌워졌던 ‘바보’ 이미지를 그대로 ‘미러링’함으로써 유머를 극대화했다.
<인크레더블2>와 <고스트 버스터즈>는 주인공의 자리를 남성이 아닌 여성의 얼굴로 전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인크레더블2>는 비단 전복에 그치지 않았다. 여성 히어로에게도 ‘아내’가 필요하지 않냐는 질문을 사회에 던졌다.
영화는 불법화로 인해 떨어질대로 떨어진 히어로들의 위상을 되살리기 위해 나선 재벌과 인크레더블 가족이 만나면서 전개된다. 재벌은 Mr.인크레더블이 아닌 일라스티걸을 ‘히어로 합법화 프로젝트’의 선두주자로 택한다. 이유는 자본의 논리였다. 일라스티걸이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과학적 추론을 따른 것이다.
일라스티걸의 등장은 곧, 인크레더블 가정 내 엄마의 부재였다. 히어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질풍노도의 시기 딸 바이올렛, 수학숙제에 골머리를 앓는 대쉬, 본인의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막내 잭잭을 돌보고 살피던 엄마가 없어진 것이다. 영화는 헬렌(일라스티걸)의 부재로 밥(Mr.인크레더블)이 대신 엄마와 ‘아내’ 역할을 하면서 겪는 고군분투를 성실히 그려낸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바이올렛의 고민을 해결해주려다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기도 하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대쉬 대신 풀기 위해 밤새 문제집을 붙들고 공부하기도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잭잭한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24시간 잠을 못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오는 지경에 이른다.
밥이 집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헬렌은 아내가 되기 전처럼 일라스티걸로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열차사고를 막아내고, 특사 또한 위기에서 완벽히 구출해낸다. ‘히어로 합법화 프로젝트’는 헬렌의 혁혁한 공으로 인해 우호적 여론이 형성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헬렌이 일라스티걸로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밥의 존재가 컸다. 양말을 찾는 아들의 전화에 “엄마 지금 바빠”라며 바로 전화를 끊을 수 있었던 것도 아들 옆에 남편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밥은 세 자녀의 양육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아내’로서 헬렌을 충실히 내조한다. 그렇다. 헬렌의 성공에는 밥이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밥이 결혼을 한 뒤에도 프로존과 ‘선행’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헬렌이 아내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그간 남성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저녁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봤음에도 가려져왔던 ‘아내’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가정과 일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책 <아내가뭄>의 저자 애너벨 크랩이 한 말이다. 일터에서 여성과 남성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동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 탓이다. 기혼 남성의 경우, ‘아내’가 있지만 기혼 여성은 ‘아내’가 없다. 일과 가정 양쪽 모두에서 노동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슈퍼 히어로’가 되기를 강요받을 뿐이다. 일터에 나간 여성은, 아내가 있는 남성과 사실상 2:1의 경쟁을 하게 된다.
“바깥일은 남자가, 집안일은 여자가” 라는 과거의 통념이 어느 정도 해소됐을지언정 여전히 여성은 가사노동과 독박육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공적인 일은 성별화가 흐릿해졌지만 사적인 일은 여전히 여성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 히어로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말은, 밥이 헬렌 대신 독박육아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도 가사도우미를 고용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간 지워지고 잊혀진 아내들의 노동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필요하다는 건 모두가 아내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를 가진다는 건 ‘특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인크레더블2>가 스크린 밖 사회에 던진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