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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각시 Aug 06. 2018

<10개월> 임신은 축복일까?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영화는 화장실에 앉아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파트너 세르지는 화장실 바깥에서 테스트기 사용법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늘어놓는다. 5초 동안 소변을 봐야한다거나 테스트기를 충분히 적신 후 2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두 줄의 선이 테스트기에 선명히 드러난 걸 확인한 올리비아는 세르지와 환희를 나눈다. '비극'의 시작이다.
  


ⓒ Olmo and the Seagull 홈페이지


영화 <10개월>은 임신으로 인해 여성이 겪는 총체적 변화를 묵묵히 보여준다. '임신은 축복' '사랑의 결실' '잉태는 경이로운 경험' 등의 사회가 부여한 '임신 판타지'를 과감히 깨뜨린다. 임신이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음을 당사자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출산과 육아를 오롯이 여성 개인의 일로 위치시킨 채 거리두기를 해온 사회에 '짱돌'을 드는 셈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건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말이다.

 


'이건 너의 일이야'라는 선 긋기



올리비아는 연극배우다. 세르지와 극단에서 만나 사랑을 키웠다. 안톤 체홉의 희곡 <갈매기>의 공연을 준비하던 그녀는 임신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친다. 


비극은 극단 동료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서 전개된다. 동료 한 명이 배가 부른 몸으로 어떻게 무대에 설 수 있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화를 낸다. 올리비아는 무대의상은 몸에 맞게 수선하고, 출산이 임박했을 땐 아이를 낳고 돌아와 다시 무대에 오르면 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또박또박 자신의 일할 권리를 주장한다. 

동료들 사이 설전이 오가지만 곧 축하하는 자리로 무마된 채 고민의 몫은 올리비아에게 온전히 전가된다. 마치 '이건 네 일'이라며 철저히 선을 긋는 듯하다. 갑작스레 복통을 느낀 올리비아는 병원으로 향한다. 


"이대로라면 유산할 위험이 크다"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결국 무대에 서기를 포기한다. 올리비아는 꼼짝없이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집 안에 갇힌다. 심정을 묻는 감독의 물음에 "바닥이 푹 꺼진 것 같다, 주위에 붙잡을 것조차 없다"며 절망감을 드러낸다. 



  


ⓒ Olmo and the Seagull 홈페이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올리비아의 고독은 끔찍하리만큼 지독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스크린 속 올리비아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영화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다. 4개월의 '감금 생활' 동안 고독과 함께 따라오는 고통은 올리비아 혼자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파트너 세르지의 경우 잠시 동안 '휴식'이 허락된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10시간을 내리 일해야 하는 세르지는 올리비아의 분노로 뒤바뀐 고독을 마주하는 몇 시간 외엔 이 고통을 외면할 수 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아이를 제 몸에 품은 엄마는 잠깐의 '휴식'도 외면도 불가능하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무책임한 위로가 올리비아와 세르지에게도 효과가 있던 걸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임산부는 임산부대로 파트너는 파트너대로 나름의 '고독 매뉴얼'을 체득했다. 세르지가 택한 방법은 질문하기다. "오늘은 뭐했어?"라는 물음을 통해 당사자가 직면한 고독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노력한다. 이에 올리비아는 "간도 만들고 귀도 만들고 눈썹도 만들었겠지"라고 냉소적으로 응답하지만 파트너와의 소통은 올리비아 안의 분노로 응축된 '호랑이'를 잠재운다.
 




임신은 판타지가 아닌 일상이다



올리비아의 방법은 몸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슴이 커지고 배가 부풀어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이와 자신의 관계를 인지한다. 관객도 올리비아의 시선을 따라가며 임신이 판타지가 아닌 일상임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10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생명체가 '뿅'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셈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생긴다'는 개념을 사회는 확실히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여성 자신의 삶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180도 뒤바꾸는 임신이라는 경험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꼬집는다.


임신은 2.5~3.8kg의 무게가 여성의 몸에 '그냥' 더해지는 게 아니다. 나와 내 주변의 변화를 마주하고 책임감의 무게를 버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엄마 혼자서 견뎌내라기엔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임신이 개인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임을 상기시킨다.

영화에서 참을 수 없는 고독은 올리비아의 출산과 함께 끝이 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임신은 여성의 의무처럼 여겨지는 데 반해 이에 따르는 책임감은 공유되지 않고 있다.


뉴스에선 해마다 떨어지는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을 '사건'으로 보도한다. 실제로 한국의 2016년 합계출산율은 1.17명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하지만 수치화된 통계자료에 의존해 '사건'으로 보도하기 이전에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의 책임을 '누가' 전적으로 부담하고 있는지, 그것이 정당한 일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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