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의 아이들은 마스크보다 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대치동의 아이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그 애들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또 학원에서 학원으로, 독서실로, 마치 통통 튀는 배구공처럼 이리 저리 옮겨간다. 아니 배구공이라고 하기에는 생기가 없다. 마치 공장식 축산에서 키워지는 양들처럼, 닭들처럼,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면서 마치 학원에서 자신의 생기를 빨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움직인다. 그 애들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 애들이 종종 웃을 때가 있다. 내가 조금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힘들지? 따위의 안부를 묻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이다. 당연히 그 애들도 사람인지라 웃고, 울고, 슬퍼할 때가 있는데 왜 늘 죽어있는 것 같을까. 눈을 빛내며 내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가리키는 애들을 생각해본다. 쌤, 남친 있어요? 쌤, 몇 살이에요? 쌤, 쌤, 쌤.... 그럴 때마다 이 애들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아이들의 생기를 빨아먹고 자라는 그 곳. 대치동은 이상하다. 불이 꺼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번쩍거리는 학원가와 골목마다 있는 햄버거집, 5분만에 밥을 먹고 나갈 수 있는 곳, 대형 학원들, 창문을 없애거나 가려서 바깥의 시간을 알 수 없는 공간. 그 곳에서 나는 일을 하고 있다. 정신 없이 수업을 하고, 자료 정리를 하고,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들리는 밤의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제야 퇴근한다고 트위터나 카카오톡으로 징징댄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자동차를 끌고 나왔는지 도로는 꽉 찼고, 핫팩을 쥐어주는 부모들과 가방을 대신 매어주는 부모들이 한데 엉켜 요란이다. 나는 가만히 이어폰을 꽂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3호선은 미어터질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켠 트위터에서는 비슷한 논쟁이 반복되고는 한다. 그것은 바로 대치동 학생들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불행만 안다는 것, 타인의 불행을 모른다는 것,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찬 세계를 모른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 불행을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는 그네들을 마구잡이로 비난할 수가 없다. 대학을 서열화하는 사람들. 이 대학이 아니면 죽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 너 때문에 집에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 노력만 하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데 공부를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 공부가 아니면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가 학생인 시절에도 있었고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있었다. 그런 인간들은 잘 멸종하지 않는다. 끝까지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학생들의 세계가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대치동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매일같이 공부하라고 닦달을 한다. 수업을 하면서 이렇게 공부해라, 성실하게 해라, 하고 온갖 입을 대는 것이다. 생각을 하자니 한숨이 나와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끄고 책을 읽는다. 대치동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노래를 듣고 책을 읽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역시도 이 곳에 생기를 빨아먹힐 것 같았다. 이미 젊음을 좀먹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종종 문학을 가르칠 때가 있다. 비문학도 문학도 모두 가르치지만 문학을 가르칠 때는 특히나 더 열심히 한다. 그들에게 슬픔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고통이 가장 커 보일 때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보일 때고, 내가 힘든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는 세계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의 슬픔을 가르쳐야 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들은 매일같이 코피를 쏟고 복통을 호소하고 어깨폭보다 조금 넓은 자습실 책상에 엎드려 몇 분간의 쪽잠을 잔다. 이 아이들에게 슬픔을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의 슬픔이라도 더 건져내보려고 한다. 나는 말로 통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원히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느니 차라리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슬픔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책과 교육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일들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책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쥐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것들을 알고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평평한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음을 알게 되지 않는가. 나 역시도 잘 알지 못하는 세상의 무언가를 건져내어 아이들에게 건네주는 것. 그러나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마스크만 낀 아이들의 눈이 피곤으로 지쳐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한다.
대치동의 아이들은 오늘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햄버거를 먹고, 나는 그 애들과 함께 영원히 고등학생일 것만 같다. 내가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잠시 그 애들도 결국 아직 어린 학생이라는 것을, 세상 천지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만을 만나면서 달려나가기를 강요받는 학생들임을 시시각각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또 닭장같은 강의실로 들어간다. 애들이 하나씩 픽픽 쓰러지는 강의실로. 자신의 슬픔만 알도록, 분노할 방법도 알지 못하도록 가둬두는 강의실로. 나는 이것들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내일을 생각하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체 내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내일을 가둬두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다. 이 하얗게 얼굴이 질린 아이들을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잘못이다. 대학을 줄세우고 명문대가 아니면 교묘하게 비웃고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량화하여 평가하는 우리의 잘못이다. 나는 그런 줄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