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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웰제이드 Aug 16. 2024

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돌싱 준비 과정



  3개월의 유예기간을 두게 된 것이다. 판사 앞에서 이혼의사를 밝히고 서류를 받아왔으니, '찐막'으로 다시 노력해 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구청에 가서 이혼신고만 하면 된다.

  진짜 마지막, 찐막이다. 술자리로 치면 '딱 한 잔만 더 해~', '자, 막잔, 짠~' 하다가, '한 병 더', '두 병 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지막이다.


  이렇게 상황이 오기 전까지, 나는 현실적으로 돌싱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멘탈(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다음 챕터를 시작하기 위해 봉우리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안 놔주기 때문이다. 그 생각들은 자질구레하기도, 찌질하기도, 나를 패배자로 추락시키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미혼이던 시절, 기혼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저럴 일 없을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자신만만함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나를 낮추는 법을 배웠다.)

  이혼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남편이 바람을 것도, 도박을 것도, 구타한 것도 아니지만, 결혼생활 유지에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명백한 이혼사유가 없는 것만 같은데, 내가 이혼을 하는 것이 맞을까, 내가 지혜로운 아내가 아니기 때문일까, 나약한 걸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부싸움 안 하는 부부는 없다는데... 신혼부부 때 서로 맞춰가기 위한 과도기를 누구나 겪는다는데, 누구나 다 하는 그 과정을 내가 극복하지 못하는 걸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혼은 굳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혼사유는 명백했다. 비록, 남편은 나에게 살면서 번도 들어본 없는 온갖 폭언들을 해댔지만, 나의 부모님 조차 처음에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좀 참아주고 지켜봐 주면 어떠니', '남편을 아들 다루듯이 어르고 달래 보면 어떠니'라는 말을 했었으나, 이혼사유는 명확했다.

 '결혼유지'가 꼭 '결혼생활의 성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남편도 30년이 지나고 60대가 되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변할 수도 있겠지. 근데 내가 그 30년을 굳이 참고 살 필요가 있을까?'

  없다. 

  '남편도 나로 인해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하는데, 그런 남편과 결혼생활 유지를 위해 어떤 것을 더 할 수 있을까?'

  없다. 그와 내 영혼 모두가 갉아먹히며 사는 삶은 절대 성공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혼이 꼭 실패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 개인상담을 몇 차례 받았다. 부부상담 5회기가 남아있었는데 남편이 도중에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덕(?)에, 남은 회기를 개인상담으로 전환했다.
  인생 첫 상담은 대학교 시절이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친구가 '학교심리상담센터에 신청하면 무료로 10회 상담해 준대.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데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다 받아야지~'라고 했던 말에, 센터로 향했고, 당시 상담은 유익했다. 또, 남편과 부부싸움이 잦아지던 신혼 초반, '마인드카페' 앱을 통한 전화상담도 도움이 되었기에, 상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만난 상담사에게는 아쉬운 점을 많이 느끼긴 했지만, 여전히 상담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상담센터와 상담사도 잘 알아보고, 잘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배달 앱으로 음식 하나를 시켜 먹어도 리뷰를 꼼꼼히 따져보는데, 어찌 보면 상담사는 더 깐깐하게 따져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주를 보더라도 어디가 용한지 수소문해서 찾아가고, 한의원을 가더라도 진맥을 잘 보고 약을 잘 지어주는 의사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데, 내 마음을 꺼내놓는 상담센터는 더욱 그래야 한다.

  상담을 받으며, 결혼생활 중 발견한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나의 가족관계와 어린 시절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해, 심연까지 파고 들어갔다. 또, 이혼으로 겪은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받았다.


  또,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다. 혼자 있을 때는 굳이 슬픔을 회피하거나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겨 외면하지 않고, 아픈 마음을 인정하고 눈물샘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엉엉 울어댔는데, 눈물 댐을 쳐서 막아놓지 않고 그때마다 흘려보내기 위함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가까운 지인들과 가족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과 나의 자매들은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는데, 이혼을 해야 했을 때도 그랬다. 가족에게 가장 미안하기도, 이혼이라는 어려운 인생의 갈림길에서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났다. 30대가 되며 인간관계에 20대만큼 연연하지 않게 되었고, 만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마음이 헛헛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다정함과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남았기에 그들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단, 결혼생활과 이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결혼과 이혼을 떠나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여전히 많았는데, 누구의 아내로 살며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다. 나의 일상생활, 취미생활, 반려견과의 동거생활, 직장생활, 여행계획 등 나눌 이야기는 많았다. (그리고 남편과의 사건사고를 복기하고 말로 꺼내는 게 그 당시 감정을 상기시켜 나에게 아직은 힘들었고, 누군가에게 감정 풀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 건강도 따르기에, 어느 정도 정신이 차려졌을 때, 침대를 벗어나 움직일 수 있었을 때부터는,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헬스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테니스에 다시 열정을 불태웠다.
  테니스를 치는 동호인들은 공감하겠지만, 테니스장이 있는 곳이라면, 서울, 수원, 용인, 화성, 오산 어디든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가는 편이다. 차를 운전해 여러 지역으로 테니스 치러 가는 것은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드라이브 같기도,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돈을 모아야 했다.
  이사 갈 집을 몇 개월 이내로 구해야 하기 때문에, 전세 보증금, 중개수수료, 이사비 등 계산기를 두들겨보고, 주식과 비트코인에 흩여져 있던 돈도 모두 계산해 본다. 돈이 부족하면 모두 끌어다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당근마켓에 내다 팔, 돈이 좀 될만한 물건도 없는지 생각해 본다.
  '폴로셔츠... 지공도 안 한 새 볼링공, 여분의 테니스 라켓... 그리고 (명품) 가방...?'
  필요하진 않은데 끌어안고 살았던 물건들을 이 참에 정리해 보기로 한다.
  '결혼반지는... 아무래도 팔아야겠지. 지인들이 집들이 선물로 줬던 금덩이도 팔아서 반반 나누고 정리해 버려야지.'
  다른 물건은 몰라도, 결혼반지만큼은 처분을 해야 했기에 반지를 구매했던 매장에 직접 문의를 했다. 구입했던 가격의 1/3 가격에 다시 매입을 한단다. 결혼반지도 결국 웨딩 프리미엄이 붙어 거품이 낀 가격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와닿는다.

  남편은 월세 집을 구해서 계약을 앞두고 있다고 했고, 나도 부동산 몇 군데에 연락을 취해,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이혼을 번복하면서 보증금의 10%인 가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손해를 봤는데, 후에는 이혼을 번복하는 것이 손해 본 가계약금보다 더 가치 있다며 말을 하기도 했다.)


  집을 볼 때 예산은 줄어들었고, 조건은 까다로워졌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결혼할 때, 엄마는 딸이 결혼하는 데 뭐라도 해주고 싶다며 극구 부인을 해도 가전제품과 가구를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가전, 가구를 모두 가져가기로 협의했기에, 짐이 다 들어가는 너무 좁지 않은 집이 필요했다. 입양한 강아지는 남편을 무서워해, 남편은 강아지 양육을 나에게 양보했기에 반려견도 가능한 집이어야 했다.
  신혼생활 내내 '돈'에 예민한 남편이었기에(평생 사주나 점을 안 보던 내가, '이혼도 하는데 점을 못 볼 건 뭐야'하며 태어나 처음으로 신점을 본 적 있는데, 무당의 첫마디가 '남편이 돈에 아주 환장한 사람이야'였다.), 새로운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돈 문제로 또 싸우지 않아도 되었고, 온전히 내가 조사하고, 내 소득과 능력으로 내 분수에 맞게 대출을 받을 수 있고,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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