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계속 느끼는 건 '여유'다. 바쁜 도시 일터가 아니라 관광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지만, 이번 유럽 여행지들에서 여유를 느낀 순간들이 가득했다.
페나성에 도착해 한 숨 돌리니 젤라토 트럭이 눈에 들어온다. 젤라토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늘어서 있어도, 트럭 사장님은 조급하지가 않다. '젤라토 왜 이렇게 늦게 퍼 줘' 투정부리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사장님은 '무슨 맛(flavour) 먹는다고 했지? 미안, 그 사이에 깜박했네. 다시 말해줄래?'하며 오히려 사람들과의 스몰 톡(small talk)을 즐긴다. 젤라토 트럭 사장님은 젤라토 하나라도 더 팔아야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순간에 진심 있게 하는 태도에서 빛이 난다.
신트라역에서 버스를 탔을 때도, 딱히 우리나라처럼 정해진 출발 시간도 없어보인다. 있다고 해도 안 지켜져도 그만인 것 같다. 큰 문제가 될 게 없어보인다. 시간이 지연되면 지연되는대로 운행한다. 물론 네덜란드 시내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더 잘되어있다고 느낀 버스 시간 알림 기능을 보며 감탄하긴 했지만, 여행지에서 조차 1분 1초를 두고 예민하게 굴 필요는 전혀 없었다.
포르투갈은 버스 티켓을 현금으로 사야 한다. 2.5유로. 버스 기사님에게 구매할 수 있다. 기사님은 동전이 가득 든 커다란 가방을 허리춤에 매고 거기에서 잔돈을 꺼낸다. 승객들 한 명 한명에게 차근차근 잔돈을 거슬러주고 티켓을 건넨다. 창문 밖으로 풍경을 보며 앉아 기다리다보면 버스는 출발한다.
분명 신트라역에서 목적지까지 버스로 15분 거리라고 했지만, 많은 택시와 렌트카와 뚝뚝으로 길이 막혀 45분이 걸렸다. 그래도 딱히 답답해하고 조급해하는 관광객도 없어보였다. 처음에 나는 초조했지만, 나중에는 도착 시간에 내 마음의 초조함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순간의 여유를 느꼈다.
페나성은 고지대에 있는데, 당시 포르투갈 왕실이 여름 더위를 피해 이곳에서 휴가를 즐겼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시원했다. 사실 춥기까지 했다. 에어컨 강풍과 비교한다는 것조차 상대가 안될 정도로 좋은 공기였다.
내가 페나성에 여름 휴가를 오던 왕족이라고 상상하며 관람을 시작했다. '저 침대에서 자고 아침에는 저 화장대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식사는 여기에서 했겠구나' 상상에 빠져본다.
페나성 일부 구역은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마치 샹들리에 같이 천장에 불여놓고 아래로 쭉 늘어지게 한 장식품이었는데, 식물의 가지와 덩굴, 그리고 꽃을 표현한 장식품이었다. 초록 잎들은 스테인글라스처럼 반투명해서 햇빛이 닿자 영롱하게 빛났다.
복구 전문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장식품에 둘러 앉아 무언가를 뿌리거나 세밀한 붓으로 칠을 하거나 다양한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조차 여유가 느껴진다.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며, 필요한 말만 하는 내 일터의 정서와는 달랐다. 포르투갈어를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작업하는 곳에서 어느 정도 기분 좋은 톤의 대화들이 오갔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와 별개로 그들에게서 여유와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느리면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답답함과 여유는 별개라는 것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식당에서도 'I'm finished' 하면 다 먹은 접시만 치워줄 뿐, 영수증을 바로 내밀지도 않는다.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그때야 영수증을 주고, 내가 영수증 내역을 충분히 확인한 것 같으면 카드결제기를 가지고 다가온다. 음식은 주문 후에 대부분 빨리 나오는 편이었지만, 음식을 다 먹고 남은 커피나 와인을 그 자리에 앉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빨리 먹고 빠르게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에서는, 카운터로 직접 가서 결제한다고 해도 문제 없었다.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내 여행의 꽤 많은 순간들이 느리고 여유롭지만, 불편하지 않게 흘러갔다.
효율 중심의 일상과는 다른 세계의 리듬을 발견해 잠시 그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었다.
때로는 '도착은 할 것이고, 지금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는 순간도 있었는데 인생도 비슷하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불안함과 초조함은 '내가 없어진 줄 알았니? 나 사실 네 옆에 항상 있었는데?'하며 불현듯 나타나는데, 이럴 때마다 지금은 출발 전 기다리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애쓰던 것을 멈추면, 흐르는 시간 말고 다른 것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느리게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았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