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지도 내려놓고 걷기(신트라, 포르투갈(1))

by 고잉웰제이드


구글 지도가 엉망이다. 산속이라 어느 정도 트레킹 코스가 있긴 하지만, 자연을 가급적 보존하고자 했던 의지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풀들을 깔끔하게 깎아 가꾼 산책로가 아니라, 덜 다듬어진, 그래서 살아있는 길.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는 기분이었다. 과장해서 '개척자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었다.


결론적으로 구글 지도는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지 못했다. 버스 정보도 엉망이다. 분명 블로그나 민박집 사장님 이야기로는 버스로 10분 거리라 했는데, 구글 지도는 40분이 걸린다고 알려줬다. 구글맵은 내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추천 경로도 엉뚱했다.



가끔 했던 생각이 있는데, 산속에서 길을 잃고 있자니 그 생각이 더 또렷해진다. 지금처럼 구글 지도나 내비게이션이 잘 되어 있지 않던 시절, 우리내 아버지들은 종이 지도를 펼쳐가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어떻게 운전해서 다닌 건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생각이 더 번뜩였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모든 전철역엔 노선표 팸플릿이 있었다. 펼치면 크지만 접는선을 따라 3번 접으면 주머니에 쏙 들어가게 작아진다. 엄마와 전철 타고 나들이 가는 날이면 노선표를 펼쳐 어디에서 환승할지 몇 정거장을 이동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전철에 올라탔다.


산속 트레킹 코스를 걷고 있자니 내 생각이 물꼬를 텄다. 겨울방학을 캐나다에서 보낸 15살도 떠올랐다. 영어학원에 다녔는데 개강 전날, 이모와 함께 집에서 학원까지 길 찾아가기 예행연습을 했다. 집 앞 버스 정류장 위치, 어떤 전철을 타야 하는지, 몇 번 출구로 나가 어느 방향으로 걷는지까지 차근차근 연습했다.


"자, 전철에서 내려서 2번 출구로 나오면 저 도서관이 보이지? 그럼 제대로 내린 거야. 저 높은 빌딩을 보면 오른쪽으로 꺾어. 이렇게 기억해 두면 길을 찾기 더 쉬울 거야. 또 가다 팀 홀튼 카페가 보이면 그 2층이 학원이야."


이모는 연차까지 내며 나에게 혼자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대망의 홀로 학원 가기 첫날. 학원까지 도착하는 것은 긴장했던 것보다 순조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갈 때는 사람들이 전철역에서 우르르 내리는데 그때 따라 내리면 됐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갈 때는 버스를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중학교 영어 Listening Test를 치르듯 버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들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안내방송 듣고 하차 정류장 맞히기 문제, 실패.


청각에 실패하자, 그다음은 시각에 의존해 볼 차례였다. 번화가를 벗어나 주택들이 모여있는 한적한 동네였는데 집들이 다 비슷해 보였다. 이번에도 실패. 어디에서 하차벨을 눌러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이모 집을 이미 지나친 것은 확실하다'는 직감이 들었을 때, 얼른 벨을 눌러 내렸다.


길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캐나다 캘거리의 겨울은 영하 40도. 등을 돌려 버스 타고 온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추위는 털 부츠를 뚫고 들어왔다. 발가락은 점점 시려왔다. 걸음을 빨리하다 보니, 코에서 나오는 콧김 때문인지 코끝에 마른 고드름이 맺혔다. 휴대폰도 없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걷는 것밖에.


그러다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 같아 보였는데, 고맙게도 그 여성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느낌상으로 '괜찮니? 무슨 일 있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모가 집 주소를 적어준 종이를 꺼내 보였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Thank you'라고 말한 뒤 그쪽을 향했다. 조금 더 걸으니, 연못이 보였다! 이모 집 근처에 있는 바로 그 연못. 동네 아이들이 꽁꽁 언 연못 위에서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었다. '휴, 살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현재의 나는 포르투갈 신트라, 페나성으로 가는 산속에서 또 한 번 길을 잃었다.

구글맵이 없던 어린 시절의 그 길찾기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나 무려 네이버 지도, 구글 지도, 내비게이션, 그런 것 없던 시절에 자란 세대잖아. 오늘은 몸이 좀 고생하는 날이겠구나'하고 마음을 비운 채 걸었다.

'어찌 되든 목적지에는 도착할 거니까, 가는 길의 낯선 식물들도 자세히 보고 느껴보자.'


단화의 밑창이 곧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무사히 페나성에 도착했다. 분명 버스를 이용하면 그리 어려운 여행 코스는 아니라고 했기에, 얇은 단화를 신은 탓이었다. 입장예약 시간에 늦었지만, 직원은 바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오히려 운이 좋았다.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도착했으면, 나도 서서 기다릴 뻔했는데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이 날은, 최적의 경로로 목적지 도착하기에 실패했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나는 실패에도 담담했던 것이 떠올랐다. 길을 잠시 잃는 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목적지를 내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내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목적지에는 어차피 도착할 테니, 아니, 도착하지 못해도 또 다른 길이 있을 테니, 발을 동동 구를 필요는 없다며 되레 침착해지곤 했다.


반대로 요즘의 난, 대체로 길 헤매는 것을 싫어했다. 네이버 지도로 최적의 경로를 검색하고, 50m 더 걷는 것도 줄여보려 한다. 괜히 몇 걸음 더 걷는 것도 손해이고 낭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몸이 고생하는 것 같아 그것도 싫었다. 그래서일까, 인공위성이 알려주는 최적의 경로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어린 시절의 덤덤함을 다시 장착해 본다.


노선표 팸플릿 위에 두꺼운 펜으로 화살표를 그어가며 직접 만들었던 경로도, 추운 겨울 나의 언어가 통하지 않던 캐나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한 사람의 도움으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던 그 길도, 구글맵이 작동하지 않아 팻말을 참고하고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찾아갔던 페나성까지의 트레킹 코스도, 모두 길을 잃은 덕분에 선명하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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