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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Feb 22. 2021

마스터(2012) 리뷰


누구도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불가역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때때로 시야를 가릴 만큼 커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하며 주저앉는다. 나아가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그림자에게 여러가지 이름을 붙여가며 정복을 시도해왔다. 카르마(Karma)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PTSD라는 과학의 이름, 명칭들은 다르지만 그 수많은 이름들은 전부 눈을 잃은 사람들이 자기 앞의 코끼리를 만지며 붙인 이름들이다. 랭캐스터 도드가 만들어낸 커즈(The Cause)의 수많은 세션들도 그 이름을 정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도 과거의 그림자속에서 헤매는 한 눈 먼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인 프레디 쿠엘은 마스터와 ‘재회’하여 그를 따르는 인물이다. 랭캐스터의 말에 따르면 모든 영혼들은 수 조년 동안 우주를 배회하며 하나의 몸체에서 다른 몸체로 시간을 따라 꾸준히 옮겨왔기에, 그 둘의 재회는 예정된 것이며 다음의 만남도 이미 정해져있다. 따라서 그들의 이별은 필연적이다. 헤어져야만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컨데 커즈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이별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음 만남’은 현재 영혼이 다른 몸체로 이동한 상태, 일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마스터가 프레디에게 늘 했던 말은 이렇게 이해가 된다. “너는 내가 봐온 사람들 중에서 (죽음만큼 어려운 이별을 쉽게 해내는) 가장 용기있는 소년이다.” 물론 이것은 역설적인 비유였을 것이다. 그의 방법이 사실인지, 발 도드의 말처럼 꾸며낸 것인지, 모든 것이 미지수이나 확실한 한가지는 프레디가 그의 세션을 통해 많은 감정들을 느꼈다는 것이고 내가 주목하는 것 또한 이것이다. 작품 <마스터>에서 등장하는 방법론적인 이야기들은, 그것이 비록 실화에 어느정도 기반했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시나리오의 장치로써의 허구이며 모든 드라마는 그 장치들이 캐릭터와 작용할 때 피어난다. 따라서 나는 보다 프레디와 마스터라는 인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서로 교감했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서로간의 종속의 맥락에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프레디와 랭캐스터는 삭제된 씬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 밀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다 전쟁을 경험했다는 것, 그 전쟁속에서 살아남았으나 지독한 흉터가 영혼 전체에 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명 모두 서로를 너무 필요로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프레디는 영화 초반 농부 프랭크에게 술을 권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후 세션을 통해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족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붕괴된 상태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는 아버지를 늘 그리워하고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마스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컬트가 외부의 사회적 시선에게 늘 공격받아왔으며 전 부인’들’에게 시달리고 있고, 무엇보다 그의 아들 발 도드는 아버지의 곁에서 그가 제공하는 밥과 술을 마시면서도 속으로 그의 권위를 무시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전형적인 젊은 오이디푸스의 초상이다. 젊은 아들이 아비를 부정하려면 과연 어떤 명분이 필요할까? 나는 두말없이 어미에대한 동정이라고 말하겠다. 


랭캐스터는 페기의 말에 따르면 여러명의 전부인을 두었고 또 그녀의 임신은 발, 엘리자베스 그리고 페기가 품고있는 아기 모두 다른 배에서 나왔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과정에서 발 도드는 버려진 어머니에 대한 동정을 명분으로-그 바닥에는 아비에 대한 열등감과 그럼에도 자신이 그의 밑을 떠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패배감이 있었을 것이다-아버지를 증오하고 그의 존재를 부정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가 옥에서 풀려난 뒤 마련된 가족 식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또 클락이 자신의 장인(Father in law)을 이름보다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는 비일상적인 장면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랭캐스터가 오랜 시간 자신과 영혼으로 이어진 아들을 갈구했음을 확신했다. 삭제된 씬 중 스플릿 세이버의 세미나에서 제복을 입고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 프레디를 바라보던 랭캐스터의 눈빛은 정확히 아들의 성공을 바라보며 흡족해하던 아버지의 눈빛 그 자체였다. 



둘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알기위해선 그 관계가 어떤식으로 방점이 찍혔는지를 보는게 가장 정확하다. 때문에 문단을 그들의 마지막 순간의 전후로 옮겨보겠다. 스플릿 세이버의 세미나 이후 프레디와 랭캐스터, 클락과 엘리자베스는 사막으로 소풍을 떠난다. 그곳에서 프레디는 랭캐스터의 바이크를 타고 첫 재회처럼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자신의 과거를 용기있게 직면한 프레디는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며 잠이든다. 이윽고 한 직원이 전화선을 끌며 그에게 다가와 수화기를 건네준다. 전화기 너머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마스터가 있었고 그에게 영국으로 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들이 즐겨피던 담배 쿨(KOOL)과 함께. 꿈에서 깬 프레디는 쿨 몇보루를 손에 쥔 채로 다시 한번 뱃머리를 돌린다. 



그와 재회한 랭캐스터는 이런말을 한다. “프레디, 바다의 선원이여, 자넨 집세를 낼 필요도 없으니 그럼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거라. 저 땅 한점 없는 위도로” 이어서 최초로 랭캐스터의 입에서 ‘마스터’라는 말이 나온다. “한 주인을, 그게 누구든, 섬기지 않고도 살아 나가는 법을 찾는다면 우리들에게 말해주겠나? 아마 역사상 최초의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길… 행운을 빌겠네(Good luck for if you figure a way to live without serving a master, any master, then let the rest of us know, will you? For you’d be the first person in the history of the world)”


그의 입에서 직접 나온 '주인'이라는 말은 자신이 마스터라고 불리는 상황속에서도 늘 압박을 느끼고 -스플릿소드 세미나씬은 정말 이 영화의 중요한 분기점인 것 같다. 세미나가 시작되기전 마스터가 느꼈던 압박감을 생각해보라. 그 장면은 결코 랭캐스터가 현 상황을 즐기고 있지 못하고, 바꿔말해, 과거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자신도 어느 위계질서에 포함된, 그 ‘마스터’가 무엇을 의미하든, 보통의 한 사람이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프레디에게 그런 삶을 살길 기원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그 역시 주인으로부터 종속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문단의 질문은 두개로 압축된다. 대체 ‘마스터’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그리고 '살아나간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https://www.renemagritte.org


앞서 나는 과거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이며 때로 사람의 시야를 가릴만큼 커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우리의 과거가 삶의 고삐를 쥐고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게 한다면 고삐를 쥔 과거가 우리의 주인, 마스터일까? 그런 과거를 정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종 우리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마스터가 된다면 반대로 자신의 종(Subordiante)이 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주인과 종의 개념은 늘 자유라는 생각을 대척에 두고 이야기하기 마련이라면, 자기 자신의 부하가 되는 것이 정말 진정한 자유일까? 그러니까, 과거라는 마스터를 벗어나기위해 어떤 운명이나 노력, 발전 따위의 또다른 스스로의 주인을 섬기는 것. 대체 이 굴레를 어떻게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랭캐스터가 했던말이 이 지점에서 날카롭게 부딪힌다. 우리는 ‘살아가기(living)’ 위해선 무언가에 늘 종속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과거를 완전히 정복하는 그 순간에도, 그것이 현재의 나를 굴종시켰듯이 인간은 스스로의 종이 되어버린다. 미래와 희망의 노예로서. 다만 앞으로 나아가느냐 나아가지 않느냐 혹은 퇴보하느냐 따위의 방향만 달라진 것이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산다는게’ 대체 뭐길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종속됨을 요구하는가? 랭캐스터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그 대척에 있는 단어들은 Helpless(구제불능), Animal(짐승), Civil(문명화 된 시민)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사전에 따르면 의미없이 밥을 먹고 똥을 싸고, 번식을 하고 또 다른 먹이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문명화 되지 못한 짐승의 생은 ‘살아가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초원의 사자는 살아가지 않는다는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사자에겐 방향이란 없다. 눈앞에 번식상대가 있는곳으로, 먹이가 있는곳으로 그저 갈 뿐이다. 사자는 과거에 굴종하지도 않으며 미래를 위해 의지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프레디 역시 그렇다. 지구상에서 방향이 없이 존재하는 유일한곳, 바다. 바다에서 어뢰의 연료를 훔쳐 마시면서 모래사장의 여자모형을 보며 성욕을 느꼈던, 그렇게 존재했던 프레디. 그리고 그런 그를 탄생시킨 참혹한 전쟁. 그러니까 마스터는 이 현실에서 프레디가 ‘살아가지’ 못할 사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면, 부디 그곳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가치 ‘삶’을 한번 구해보라고 행운을 빈 것이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아들이 정말로 원하는 길이라면… 행운을 비는 것 외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바닷사람으로 살던 그 시기는 전쟁으로 모든 질서가 사라졌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몸 하나 보전하기에 급급했으므로 누구도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 수천명이 타고있던 갑판 위의 병사들은 역설적이게도 모두 홀로 태평양을 떠돌던 존재들이며 바다위에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단 한명, 선장도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프레디가 랭캐스터라는 선장을 만난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영화 초반에 나왔던 상담 씬 속 장교와 간부들은 전함을 이끌던 선장의 표상들이다. 리더로서 그들은 병사들에게 아무 관심도 쏟지 않았다. 자신의 꿈 이야기가 왜 궁금하냐고 물었던 프레디에게 “내가 알아야할 필요가 있으니까”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그 장교의 눈에서, 나는 어쩌면 그 장교가 국가와 시스템을 대표한다면, 그들의 무책임속에서 떠돌며 그저 '존재'하던 병사들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들이고 이 작품에서 두 주인공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던 과거는 결국 전쟁이었음을, 따라서 이 작품은 전쟁에의 고발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편으로 격한 동의를 보낸다.



결국 프레디는 아버지, 마스터가 말 한 진정한 뜻을 이해했고, 땅으로 올라와 그 순간부터 무언가에 종속되었을 것이다. 극장의 꿈속에서 랭캐스터는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넨 바 있다. “누가 네게 도달했니?(Who got to you?)” 참 아름다운 대사라고 생각했다. 정말 시적이다. 배와 육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 대사는 떠돌이 삶을 살던 프레디에게 그리고 그를 찾아서 프로이센 전쟁으로부터 수 백년의 시간을 건너온 랭캐스터에게도 가장 어울리던 말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말대로 육지로 올라온 프레디는 누군가에게 도달할것이다. 그게 영국 여인 린 맨체스터가 될 수도 있고, 또 아닐수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가 프레디에게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스터를 흉내내던 프레디를 보면서 나는 과거가 된 아버지와 미래가 된 아들이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신비한 관념에 대해 설명하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본질적으로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인 것이다.








(본 리뷰는 2020년 3월 20일 작성되었고 개정하여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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