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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Sep 08. 2021

영화 <그린 나이트> 리뷰

기사 가웨인, 준비된 자

이미지 출처: Theronin.org


이곳, 제주도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태풍 같은 비 바람이 휘몰아치고 밤으로 번진 창문이 깨질 듯 흔들어 놓을때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하필 지금인가’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창문을 굳게 잠구고 다시 방 구석에 박혀 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다. 밖에선 아무 쓸모 없겠으나, 내 방안에서라면 나는 충분하다.


기사 가웨인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그린 나이트>의 오프닝은 엔딩 시퀀스 속 몽타쥬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가웨인이 매음굴에서 눈을 뜨기 전, 건물은 불타고 남편은 아내를 말에 태운채 차고 있던 칼을 꺼내든다. 이 씬은 분명 그가 눈을 뜨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성스럽던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와 대비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언급한 몽타쥬 속 가웨인이 자신의 초록색의 창자를 뽑아내기전 흔들리던 성 밖의 분위기와 매우 유사한 상황임을 나는 직감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가웨인의 무의식이 그려내는 현실에의 인식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직면한 그는 무의식을 통해 자신이 인식한 현실이 어떻게 전개될 지, 죽음의 문턱 너머로 엿본 것이고, 매음굴에서 잠을 자던 때에도 꿈을 통해 바깥의 세상이 얼마나 분주하고 바삐 돌아가며 또 급박한지, 그리고 그 세상속에서 자신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슬쩍 보았음이 짐작된다. 다만 꿈에서 깬 그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꿈의 망각을 경험하며 에셀과 매음굴의 나태한 분위기에 취해 다시 의식의 세계로,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보고, 잊고 싶은건 잊게 되는 그런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매음굴에서 나오면서 그는 주문처럼 한 대사를 여러 번 읊조린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준비란 무엇일까? 나는 작품을 떠나 인생을 살며 늘 이것에 궁금증을 가지고 고민해왔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 역시 가웨인과 썩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처럼 고결한 피가 아니라는 점과 유복하지 않다는 점, 그리하여 혹은 그것과는 별개로 에셀 같은 존재가 곁에 없다는 점 등 핵심적인 요소만 빼면 맞아떨어질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비유이겠으나-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들, 특히 청운을 품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라면 가웨인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영화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인생에 침투할 수 없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라 믿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나는 이제 이런 훌륭한 작품을 그린 아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적어도 이 글에서 만큼은.


따라서 관객들은 <그린 나이트>를 통해 ‘준비’의 키워드를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제시하는 어떤 키워드들은 그 네러티브의 핵심 동력으로 기능하기에 나는 철저히 나의 입장, 그리고 눈, 코, 입, 피부색을 빼고 나와 너무도 닮은 가웨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생각해보고 또 이 생각을 통해 캐릭터의 동기를 파악하고 나아가, 그래서 가웨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 나름의 추론을 해보려고 한다. 긴 서론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가웨인이 살아서 돌아갔다고 믿는 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기위해선 모든 이벤트의 설계자,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 르 페이가 왜 그린 나이트를 소환 했는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은 모두 같겠으나, 그 방법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자는 새끼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것이고 누군가는 자식이 어떤 부정한 일을 하더라도 감싸주기에 급급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재벌 2, 3세들의 부정이 미디어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지적들 역시 회자됨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벌부모의 마음이 과연 자식을 망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이미 엎질러진 강물 속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보호하기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것이 옳고 그르건 간에 말이다. 모건 르페이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자신의 마법이 소환해낸 그린나이트와 그 게임에 꾀어 넘어갈 자신의 아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가웨인을 그 고난에 밀어 넣은 것은 어쩌면 아들에게 넌 이미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혹은, “준비”란 준비할 수 없는 것임을,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그 속에서 발버둥 칠 때, 비로소 그 발버둥이 인생을 위한 준비임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모든 소환의식이 끝나고 모건르페이가 쓰러질 때 나는 복잡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다 해주었다는 생각과 아들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발버둥 치지않고 모든걸 포기하고 그대로 침전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이 섞인 단말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 가웨인은 소용돌이에 휘말려서야 그토록 꿈에 그리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린나이트라는 악몽을 만나러갈 준비 말이다. 이 생각을 곱씹어보면, 준비란 목표가 생길 때 비로소 착수되는 성격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아무 목표도 없이 어머니의 성에 기생하며 돈이나 축내던 그에게 악몽이라는 목표가 생긴것이다. 그 목표는 스스로 선택한 자의적인 것인 동시에 타인의 시선과 이목이 집중된 강제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인생의 목표란 이렇게 반반의 성격을 지닌다. 인류를 자신의 피로 정죄한 예수조차도 십자가에 못박히는 목표를 지님에 있어서 자의와 타의가 섞여 있었는데, 어찌 그의 자손을 자청하는 영국 왕실의 가웨인이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예수보다 한참 낮은 수준의 고난과 십자가를 짊어진 내가 어찌 자의만으로 고결한 순수이성의 십자가만을 등에 지며 살 수 있겠는가. 불공평한게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이자 섭리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백신처럼 미리 소용돌이의 맛을 조금씩 조금씩 선험적으로 깨달으며 진정한 소용돌이가 오기전에 그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분명 소수지만 존재한다. 그들은 현명한 사람이다. 현명한 피와 현명한 가정환경, 어떤 것 때문이든 그런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세상에 내던진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안정된 환경에서 재도전의 기회를 꾸준히 제공받을지라도 그런 노력을 하며 지혜를 터득하는 것까지 특혜라고 비난할 순 없다. 가웨인의 경우를 보면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거의 무한한 재도전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연습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정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관성처럼 그의 어리석음은 꾸준히 튀어나와 목표로 향하는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목을 잃은 여인에게 너무도 뻔한 사심을 담아 거래를 제안하고, 작은 친절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업신여겼다. 은근슬쩍 스스로를 기사라 칭하며 기사로서 행해야할 기사도를 어기고 인간이라면 응당 지켜야할 약속역시 가벼이 여겼다. 다만 운이 좋아 그가 도망치던 방향과 목표에의 방향이 같았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도망치는 방향은 늘 목표로부터 멀어지는 곳을 향한다. 그래서 인생에서의 도망은 늘 낮은 효율의 선택을 대표한다. 힘은 힘대로 들고, 그 끝에는 잔혹한 결말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도망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도망이 결국에 해피앤딩이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망이 잠깐의 재충전이었을뿐, 도망의 길 끝까지 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도망의 길, 그 끝에는 언제나 추악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웨인은 정말 운좋게도 도망친 방향이 그의 목표지점과 맞아떨어졌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이 서사를 통해 나는 다시한번 확신한다. 그의 어머니가 만일 이 모든 이벤트의 설계자라면, 그의 도망 역시 목표로 향하는 여정 중 하나가 될 수 있게 설계했을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가웨인이 살아서 집에 갔을 것이라고. 자식이 순교자가 되어서까지 가문의 명망을 떨치길 바라는 어머니가 과연 존재할까? 비록 로워리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이고 그는 가웨인의 죽음을 바랬다지만, 가끔 훌륭한 작품 속 캐릭터는 감독의 바램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보여준다. 마치 신이 인간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훌륭한 작품도 가끔 감독의 의도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작품<그린 나이트>는 그런 작품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가웨인에게 준비란 무엇인가? 작품은 확실한 한 줄기의 서사를 지녀야 하며, 그 서사는 상징을 포함한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이 준비를 무엇으로 꼬집어 정의할 순 없었겠으나 예술에선 분명 하나의 상징으로 그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웨인의 준비는 그의 어머니가 선물한 초록 허리띠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법이며, 마법을 둘러싼 어떤 초월적인 힘이며, 무한한 부모의 자식사랑이며, 가웨인이 늘 받아왔던 신성한 권위의 가호이다. 그 안락한 보호 속에서 가웨인은 결코 원탁의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여 운 좋게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인생이 잘 풀렸다고 한들 그 끝은, 그가 죽음에서 엿본, 비참한 결말 그 뿐이다. 비참하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초록 허리띠를 메고 살아가는 가웨인은 단 한순간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웨인은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너머로 그 진리를 본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가 허리띠를 풀어 헤친 그 순간, 그는 준비된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린나이트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 한 것이다.


훌륭한 영화가 담고있는 훌륭한 이야기들은 늘 현실과 예술을 혼동케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준비는 어떤 상징일까,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우리 인생은 하나의 굵직한 서사로 이루어져있지도 않고, 어떤 멋진 상징들로 채워져있지도 않다. 지리멸렬하고 3류 시나리오 작가가 쓴 듯한 중구난방의 이벤트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들의 인생이다. 그렇지만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서사가 진행되는 구조는 예술과 현실이 다를것이 없다. 비록 현실에는 멋진 이야기도, 화려한 상징도 없지만 가웨인이 매음굴을 벗어나 세상밖으로 나왔듯 인생도 준비를 위해선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방에 박혀 준비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매일같이 준비되지 못한 하루를 반복하며 밤마다 전쟁 같은 악몽에 시달리기만 할 뿐이다. 

때마침 이곳 제주도는 비가 그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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