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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Jan 17. 2021

님포매니악(2013) 시리즈 리뷰


전부 거짓이었다. 

이것이 <님포매니악>을 보고서 든 첫번째 생각이다. 그리고 그 거짓들은 여러가지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열거해 보자면 원죄 의식과 자기 혐오, 아이작 월튼의 ‘The Compleat Angler’와 플라이피싱의 3단계, 유충(Nymph), 라팔라, 시코르스키 헬리콥터의 활공에 대한 이야기들. 케이크포크, 부르주아, 피보나치 수열과 황금비, 셋온음, 바흐의 다성음악 ‘Cantus Firmus’ 그리고 심지어 바흐의 이름으로 풀이하는 수비학까지. 동방정교와 서구 기독교의 정신에 대한 생각들과 휴머니즘 그리고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 삶과 죽음, 정치적 올바름과 소아성애에 대하여. 또 어쩌면 독재자의 학살과 살인까지도. 이 잡다한 지적 대화들은 비유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영화를 구성하지만 그 실체는 서로를 혹은 스스로를 기만하기위해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오직 하나만이 진실임을 확신했는데  바로 ‘아이러니’이다. 이 법칙만이 왜곡되거나 꾸밈없이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모습을 지켜왔으며 따라서 나는 아이러니란 무엇인가에 대해 반드시 논의해야만 할 것 같다. 이 글은 그것에 관한 글이 될 것이다.




영화는 설탕을 타지 않은 따뜻한 홍차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해, 조가 그녀의 몸을 눕히고 벽에 걸린 플라이에 대해 질문하면서 둘의 대화는 진행된다. 통상적으로 대화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을 코스요리에 비유하자면, 하나는 사회적 교류를 위해 이후에 나올 진의를 위해 오직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용도로 의미없는 단어들을 조합시킨 에피타이저(Foreplay course)대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대화 그 자체가 우리 인생에 직결적인 영향을 끼치고 서로 의미가 전달될 수만 있다면 형식에 구애받지않고 그 안의 내용이 최우선의 가치를 지니는 메인 디시(Intercourse)대화가 있다. 전자는 내용보단 그 형식과 꾸밈이 더 중요한 반면 후자는 설령 언어의 문법이 붕괴되어 상호 이해가 어렵다 할지라도 안의 메시지가 통한다면 그것만이 고려대상이다. 조와 셀리그만이 홍차를 마시면서 나누던 그 현학적이고 분석적이며 피 튀기던 논쟁들은 분명 상식적인 사회적 대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이 대화는 분명 메인 디시 대화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연히 진실을 추구하는데에 비중을 두므로, 그 대화들이 과연 진심 어린 소통이었는지 혹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찬 것이었는지를 헤아리는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답에 따라 대화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닐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말한 바를 상기시키자면 이 둘이 지샌 하룻밤은 둘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아무 의미없는 날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보고 먼저 전제하여 이야기를 풀어보자. 만약 셀리그만과 조가 그날의 대화를 끝낸 시점에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가정해보라. 그래서 그 상황이 불편했던 조가 집을 떠나면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셀리그만은 조의 말들을 기억하고 그녀의 분노어린 고해를 그리워나 할까? 아마도 또 다른 문학과 책들속의 죽은 지식들만 탐하며 조의 존재는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이런 의미없는 가정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 둘의 대화는 의미없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이끌 곳도 의미없고 보잘 것 없는,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님포매니악>은 그것을 뒤 엎는다. 셀리그만은 조를 강간하려하고 조는 결국 살인을 한다. 그들의 대화가 의미없는 거짓투성이었다면 어째서 그 무의미한 대화의 끝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악몽으로 끝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악몽을 감독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 비웃는 것일까. 나는 독자들이 이 아이러니부터 느낄 수 있게 먼저 전제를 가정하고 글을 뒤틀었다. 그러니 이제부턴 그 이유들, 작품 속 기만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둘의 의미없는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기 이전에 조와 셀리그만 사이에 놓인 근원적인 전제,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전제는 비단 섹스 횟수에만 국한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조와 셀리그만이 아예 이종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조는 석양을 보며 더 많고 다양한 색깔을 원하는 사람이지만 셀리그만은 동이 트는 해를 직접 바라보겠다는 욕구 마저도 없고 그저 옆 건물에 반사된 작은 빛의 파편에 만족하던 인물이다. 이것이 둘의 진짜 모습이다. 또 그들의 중요한 차이점은 ‘시간대’인데, 노을을 보기위해선 낮부터 기다려야 하며 해돋이를 보기 위해선 밤부터 기다려야 한다. 이는 둘의 활동 시간대 자체가 다름을 나타내기도 한다. 조가 낮시간대에 활동하는 주행성이라면 셀리그만은 야행성이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조의 과거들 중 행복과 자기만족을 느꼈던 시간대는 낮 시간대였다. 아버지와 나무를 관찰하고 달팽이를 구해주던 시간, 3+5의 제롬과 처음 관계를 맺었던 시간 그리고 그와 다시 공원에서 재회했던 시간. 많은 남자들을 집으로 불러내어 그들을 정복하고 오르가즘을 느끼던 시간과 상담모임에서 자신의 유충(님프)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받아들이던 시간. 젊고 아름다운 P를 보러 가기 위해 그녀의 학교로 가던 시간들과 그 P와 자신이 사랑했던 제롬의 관계를 알고서 전부를 포기하기 위해 절벽을 오르던 시간 그래서 마침내 조의 영혼의 나무를 발견했던 시간들은 모두 해가 떠있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반면에 밤의 시간은 대부분 그녀에게 고통으로 묘사되었다. 조의 죄의식에 깊게 박혀 있던 열차 안 신사와의 시간, 친구 B의 배신과 그 모임에서 도망쳤던 시간, 자신의 아들과 작별을 했던 시간과 P에게 배신당한 시간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 J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시간까지도 모두 밤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 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시간이란 기준이 나는 결코 우연히 생겼다고 믿지 않는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셀리그만과 조우했던 그날 밤은 가까운 미래의 조에게 있어 불행한 과거로 기억될 것이며, 그들이 밤을 지새며 대화하고 느꼈던 일종의 가장된 유대감 혹은 가까운 미래에 추억으로 불릴 수도 있었던 그 시간들의 끝은 불행이 자명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의 잣대로만 작품을 본다면 이것으로부터 예외인 시퀀스가 있는데, 한 특정한 사건이 그 구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고 그것은 조의 아버지가 섬망(Delirium)에 시달리며 병상에 누워있던 그때의 이야기이다. 조가 산책로를 통해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그 장면을 보며 에드가 앨런 포우의 <어셔가의 몰락>의 한 구절을 읊는 셀리그만의 목소리와 함께 그 시퀀스는 시작된다.

“온 종일 소리한 점 없이 어둡고 우중충하던 어느 가을날, 구름들이 위협적일만큼 하늘 낮게 걸려있던 그날 나는 말을 타고 외곽의 굉장히 음산한 땅을 지나고 있었다. 꽤 먼 거리를 온 후에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은 저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셔 가 저택의 우울한 광경이었다.”

이 구절로 시작되는 그녀의 과거는 아버지가 숨을 거둘때까지 전부 흑백으로 처리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처해있는 공간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고 그 부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간은 오직 죽음과 함께 멈춘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이다. 자신의 일부였던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그녀도 같이 죽기 시작했고 서서히 그녀 주변의 시간은 정지하는 듯 보였다. 죽어가던 조가 죽은 자들의 방, 영안실에서 그 곳의 관리인과 시체 안치대 위에서 관계를 갖는 장면이 있다. 멈춰버린 시간을 육체적 자극으로 깨워보고자 노력했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적 쾌락마저 빼앗겼다는 좌절감과 무력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좌절이 조를 울부짖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고통이 끝나던 그 순간 멈춰있던 시간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되살아나 몸이 이에 반응(Lubricated)했다. 죽어가던 그녀의 시간을 되살려낸 것은 삶도 쾌락도 아닌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셀리그만은 이 격변 속 순간 마저도 그저 신체의 화학적 반응이나 문학 사료와의 비교를 논거로써 그녀에의 위로를 가장한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시간이 멈추는 놀라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음에도-나는 감독이 둘의 대화를 쓸때 이미지없이 소리만으로 전달되는 상황에서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대사들이 마치 <애니 홀>의 ‘하이퍼 이메지네이션’ 장면처럼 과거로 돌아가 그 장면들을 보며 이야기하듯 쓰였음을 분명 느꼈다. 둘의 대화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 일종의 판타지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족이나, 기본적으로 판타지는 핍진성을 충족하는 거짓이다-이에 아랑곳 않고 문학과 과학의 ‘분석’을 읊조리던 셀리그만이 떠오르는 태양의 미세한 파편에 어떤 문학적 인용도, 종교적 분석도 없이 그저 '만족'한다고? 물론 그는 작품내내 앞뒤가 맞지 않은 태도들을 여러 번 보여줬고 그때마다 그녀의 지적에 빠른 사과와 인정을 해왔었다. 그런데 동이 트던 상황에선 이전 같은 가장 된 겸손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감상을 가장한 오만함만이 팽배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는 이미 그에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생각은 이렇다. 셀리그만 집 앞 건물에 반사된 햇빛은 그가 조를 낚기 위해 마지막으로 던진 최후의 무기 ‘라팔라’ 찌였던 것이고 바닷물만으로도 지방을 만들어낼 수 있어, 먹이의 유혹에서 자유로웠던 ‘연어’ 조는 줄곧 잘 버텨냈으나 결국 셀리그만의 승부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그가 대화 도중 자신의 본심을 나타낸 적이 한번 있다는 것인데, 소아성애자에게 조가 연민과 공감을 보냈을 때, 그 페도파일과 그녀가 외로움이라는 똑같은 십자가를 각자 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성적지향성이 서로 같은 동종이라는 이유로 조가 그에게 오럴섹스를 해주는걸 보았을때. 나는 그때 셀리그만의 조를 바라보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눈빛은 “나는 A섹슈얼이에요. 내게서 성적인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라고 말하던 이전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의 시선에는 질투가 있었고 그들의 유대감을 자신도 느끼고 싶어하던 욕구를 발견했다. 한편으로는 강의 흐름을 깨우치고 물고기가 어디에 서식하는지, 기회를 포착한 낚시꾼의 희열 역시 보였다.




셀리그만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 이런 유형의 겁쟁이가 가장 많이 나오는 영화는 당연히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다른 영화들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홍상수 영화들이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 <북촌방향>에서 보람(송선미 분)이 자신이 오늘 경험한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떼자, 그 옆에 있던 성준(유준상 분)이 상대성이론과 시공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빌어 그녀를 기만하려 한다. 당연히 그의 이론들은 플라이피싱의 낚시 찌일 뿐이며 진짜 목적은 “당신과 자고 싶어요” 이 한 마디 뿐이었을 것이다. 셀리그만과 성준, 트리에의 <님포매니악>과 홍상수의 <북촌방향>이 가지는 공통점은 겁쟁이가 용기있는자를 거짓말로써 꾀어내려하며 죽은 것으로 살아있는 것을 탐내며 기만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둘의 큰 차이라면 트리에의 거짓말은 아주 정교하고 현학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속을 수 있는 반면 홍상수는 그 거짓말 자체에 큰 공을 들이지 않기에 누가 들어도 “뭐라는거야? 유치하게”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성준의 상대성이론은 초등학교 수준의 어린이가 ‘상대성’이라는 사전적 어휘를 상식선에서 풀어서 맞춘 정도이며 과학적 이론이나  철학적 사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그 말이 극 중 술자리에서 통용되는 이유는 그 자리가 낚시꾼과 물고기들의 만남의 광장이며 테이블 위 모든 사람들이 외로움에 신음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모두가 그 다음 진의-누군가에겐 “우리 2차갈까?” 또 누군가에겐 “관심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사람 같아요”-가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본 작품으로 돌아가자. 셀리그만은 조 처럼 자신의 과거를 말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이며 누군가의 과거를 제대로 들어줄 진실된 마음도 없던 자기기만과 연민으로 꽉 차있는 죽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조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그녀에게 호의와 친절을 배풀어 그녀로부터 자신의 만족을 착취하려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셀리그만은 죽은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가 조를 강간할때 발기가 되지않아 흉측하게 늘어진 자신의 성기를 부여잡는 장면이 나온다. 발기는 혈류와 관련이 있고 상징적으로 심장의 기능은 존재의 살아있음(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발기되지 않는 성기는 이미 죽은 육체를 시사하며 그가 알고있는 모든 지식들 특히 고전들과 오래된 종교로부터 오는 죽은 생각들, 오직 권위에 의해서만 살아있다고 강제로 명명되고 그것들의 생사에 어떤 도전과 의문도 허락되지 않는-그래서 소위 배운자들은 늘 고전을 칭송한다. 고전은 실제로 죽어있기 때문에 누구도 공격하려 하지않아 매우 효율적으로 호랑이 등 위에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위대한 고전들까지도 이런 냉소에 포함시키고 싶진 않지만, 나는 그 어느것도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따라서 나는 지금의 중요성을 늘 상기한다) 간혹 불멸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볼때마다 정말 그 고전이 불멸인지, 그 권위를 빌어 불멸이 되고 싶은 자의 헛된 꿈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가 있다-그런 존재들의 표상이 곧 셀리그만이다.


그런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과연 진실이 있긴 할까? 그는 자신의 미성숙한 태도를 A섹슈얼이라는 변명에 모두 우겨넣었다. A섹슈얼이기 때문에 미성숙하다는 말인데, 이는 조의 님포매니아적 성적 지향과 그것이 그녀의 삶에 끼친 방향과 정반대로 작동한다. 조는 노을이 질 때 더 많은 것을 바라왔기에 님포매니아가 된것이지, 그 반대로 님포매니아이기 때문에 그 숱한 과거의 시간을 지나온게 아니다. 단순히 섹스중독이라서 그게 삶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런 인물은 석탄위에서 수십명의 사내를 받아내던 중독치료모임의 그 금발 여인 일 것이다. 조는 자신과 그 여인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조는 어떤 인물인가? 한가지 앞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그들의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의 고백들 역시 일정의 기만과 거짓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그녀의 과거들은 대화의 흐름에 맞게 편집되었을 수도 있다. 수술대위에서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 말하기전에 그녀는 셀리그만에게 “이건 정말 말하기 싫었지만 내가 당신의 함정에 빠졌으니까 말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셀리그만이 쳐놓은 그물은 기만의 그물이다. 그 안에 갇힌 물고기가 제아무리 헤엄친들 그곳은 그물 안일 테니 말이다. 특히 케이크 포크와 바흐의 다성음악에 빗대어 자신과 제롬의 관계를 설명하던 그 부분은 내 생각이지만 진실보단 거짓이 더 많이 들어간 이야기라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닌것에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만 정말 인생에서 중요시 여기던 인물을 처음보는 낯선이에게 설명할 때, 그리고 그와 그 과거의 시간들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다면, 과장하거나 꾸며서 말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아버지에대한 이야기도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것이기에 거짓일수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나는 제롬과 그녀의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그리고 치명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이미 죽은 인물이고, 제롬은 그녀가 낯선 노인과 말하는 그 순간에도 P와 어딘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을것이기에... 죽음엔 미련이 없지만 살아있는 모든것엔 미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것들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가슴뛰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누구처럼 방에 틀어박혀 죽은것들만 보며 살아온게 아닌,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인물이다. 다만 오만했고 멍청했다.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낚던 그 수법 그대로 한 동정의 노인에게 낚였다. 조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꾀어낸 수백 수천명의 “멍청한” 그 남자들과 힘을 잃고 셀리그만의 그물안에 몸을 눕힌 그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제롬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던 그날, 총을 장전하는 법을 잊어버려 사랑했던 제롬과 P에게 보기좋게 배신당한 그날, 조는 셀리그만을 만났고 그를 진정한 친구라고 믿게된다. 그리고 그가 상기시켜준 대로 총을 장전해 그를 죽인다. 


누가 이 끔찍한 아이러니를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영화나 문학속에 진정한 우연은 결코 없다고 믿는편인데 현실의 세계에서는 물론이고 작품속에서도 아이러니는 늘 필연의 맥락에서 야기되어진다. 위에서 말했던 시간의 속성 또한 그 둘의 비극을 예견한 암시의 일종일 수 있다. 만약 그 둘이 아침에 만났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셀리그만은 조에게 총을 장전하는법을 알려준걸까. 사실상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알려준것인데 만약 셀리그만이 현학적인 말들로 그녀를 기만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잠든 조를 겁탈하려던 그의 행동이 만번을 양보해 무엇에 씌여서 저지른 충동적인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녀는 셀리그만을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왜냐? 총을 장전하는 법을 몰랐을테니까. 




서로 다른 수많은 아이러니들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같은곳이다. 우연이란 땅에 이미 떨어져버린 사과와의 만남과도 같다. 혹은 꽃잎과 같다. 우리는 이 사과와 꽃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못한다. 근처 가로수나 숲의 나무에서 떨어졌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란 떨어지기전 나무위에 메달린 꽃과 사과이다. 나는 그런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뿌리에서 자라 하나의 몸통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수만개의 서로 다른 모양의 꽃을 피우는 나무. 아이러니는 그 나무에서 자란 꽃잎들과 같다. 따로 떼어서 보면 모든게 각자의 사연과 이유를 지니고 있고 우연처럼 보이고 관계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 뿌리는 필연이다. 땅으로 떨어지기 전의 사과를 먹기위해선 누군가가 직접 따야하듯 아이러니는 반드시 행동과 ‘업’을 수반한다. 모든 행동엔 결과가 따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사과를 따는 행위임을 모를 뿐이다. 평생 남자를 낚으며 살아왔던 그녀는 하룻밤새에 그물 속 물고기가 되었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하며 살아왔기에 처음으로 자신이 믿음을 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그를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게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와 기만들의 향연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너무 잔인한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 운명은 잔인한 비극일 때 가장 아름답다.







(본 글은 2020년 4월 11일에 작성되었고 개정하여 업로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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