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벌이다.
무엇으로부터 이 징벌이 오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삶은 너무 가혹하고 차갑고, 고통 뿐이며 그마저도 아주 찰나의 시간을 지나가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혹은 가엽게도 이 무의미함에 사람들은 짓눌리고 괴로워한다. 누군가 인생이 얼마나 역설적이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눈을 뜨면 안개가 깔린 듯 세상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발을 뗄 수도 없으며, 눈을 감으면 그리는 것이 온전하게 보이며 눈에 아른거리지만 그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인생이란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이라 정의한다면 눈을 감은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뜬다 하더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손을 뻗을 수 조차 없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무엇하나 온전히 취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작품 <문라이트>의 모든이들은 그런 고통속에 영원히 갇힌 사람들이다. 오직 죽음으로만 완전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삶의 역설 속에서, 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깊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후안의 말대로, 몸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고 그들을 파랗게 물들여주는 인생의 달빛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달빛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작 중 리틀은 마이애미의 게토, 리버티시티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싱글맘 파올라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소년이다. 파올라의 첫 등장과 그 때의 모습은 결코 그녀가 후에 리틀의 인생을 파괴하는데에 불을 지필 앤타고니스트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끔하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는 성실한 노동자로서 묘사된다. 아들에게 TV가 아닌 책을 권하며 여타 부모님들처럼 공부를 권하고 아들이 낯선, 이상한 자들에게 노출되는것을 극도로 꺼리는 등 첫 등장에서 그녀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리고 그 씬에서는 후안, 낯설고 이상한 자도 함께 등장한다. 파올라가 경계했던 후안은 후에 리틀이 쫓는 그림자가 되어버린 아버지이다. 그는 마약 딜러다. 리틀과 후안, 파올라가 함께 만난 이후 그녀와 후안은 노란 가로등 몇개만이 켜진 어두운 게토의 길거리, 그의 관리지역에서 조우한다. 그녀는 거래지역에서 절대 마약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어긴채로 후안에게 자기 아들의 성 정체성을 원망하며 약에 취한다. 그런 그녀에게 후안은 “무슨 엄마가 이런식이냐”고 따지지만 돌아오는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뭐, 네가 대려다 키울꺼야? 약은 안팔꺼고?” 후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조각 장면들을 이해하기 쉽게 나열하면 이렇다. 리틀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미래가 될 한 사내를 만났던 그 날, 그 사내는 엄마의 인생을 독으로 물들였고 중독된 엄마의 인생은 부메랑처럼 날아돌아와 리틀의 인생을 파괴했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묻고싶다. 어째서 아들은 아버지의 운명을 답습해야 하는지. 설령 그 운명이 비극일지라도.
이 얼마나 아름답고 비극적인 순간인가-나는 모든 예술이 아름다울 수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 어떤 불멸의 명작이라 할지라도, 가령 'The Wizard of Oz'의 도로시같은 헐리우드의 아이콘이나 고다르가 만들어낸 자유의 형상 'Breathless' 의 미셸일지라도 사실 그들은 죽은채로 숨쉬는 것들이며 그것들에게는 자유의지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영화의 마법이 펼쳐진다. 그 죽은것들에 숨을 불어넣는것이 시네마적 연출이며 이 인위적인 살아있음을 포착할때, 나는 신비한 어떤 완전함을 느낀다.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그런 어리석은 오만함 말이다. 따라서 영화는, 예술은 어둑한 현실에서 벗어난 온전한 어리석음의 총체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예술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취하게 하는 동시에 중독시켜 현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과연 어떤말로 그 날의 만남을 형용할 수 있을까? 이 무거운 인연은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보다 그냥 이렇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원래 고통스럽다’고.
<문라이트>의 메인 롤인 샤이론에겐 다른 두 이름이 있다. ‘리틀’과 ‘블랙’. 모두 그의 첫 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케빈이 붙여준 이름이다.(나는 ‘리틀’역시 케빈이 샤이론에게 처음으로 선물했다고 어느정도 확신한다) 이름을 붙이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바로 직전에 시네마적 연출의 의의에대해 사족을 붙인 바 있다. 그것은 죽어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 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름을 잃고 죽어간 군인의 묘비에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찾아주고 비석을 세우는것 역시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신성한 작업이다. 이로써 군인은 기억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방금 태어난 아이는 어떤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예를들어 이름없이 버려지거나 시스템의 폐해로 인해 이름없이 태어나는 팔레스타인 최전선의 신생아들, 그들은 분명 살아있다. 이름이 있든 없든간에. 다만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시스템속에서 명명되고 살아있다고 선언되며 비로소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샤이론’이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이라면 리틀과 블랙은 사랑이 부여한 정체성이다. 홍상수의 영화 <풀잎들>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사랑이 삶에서 지향해야할 최우선 가치라고 믿는다. 나머지는 사랑이 안되니까 하는것이다. 그러니까 리틀과 블랙이 샤이론보다 더 앞선 가치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상상해보자. 마약과 살인, 강도 같은 범죄를 빼고 모든것이 결핍 된 게토에서 성적 소수자로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골리앗과 싸워야 할까. 인생이 고통이 아니라면, 사랑으로부터 도착한 선물들, 그 이름들이 샤이론을 이 거인들과 맞서 싸우게 내몰았을리 없다. 삶은 고통이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사랑은 삶의 물 웅덩이에 빠져 고통으로 물들어 있기에, 사랑을 얻기위해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어떤이들, 벼랑끝에 내몰린 그들은 삶(혹은 거의 같은 맥락에서의 사랑)과 생존,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그러니까 숨만 쉬고있다면 당신이 매트릭스 속 배터리일지라도 당신은 생존하는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결국 게토의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 처럼 샤이론은 교실 의자로 있는 힘껏 골리앗을 내려쳤고 그렇게 그는 사랑을, 혹은 고통을 그러니까 삶을, 외면하고 경찰차 뒷자석에 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빈 역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외면한다. 이후 케빈의 삶은 어땠을까? 후에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그 역시 게토의 많은 이들처럼, 샤이론처럼, 감옥에 다녀오게되고 고등학교 동창과 아이를 낳게된다. 그는 자식의 사진을 보며 웃는다. 묻고싶다. 그것이 과연 케빈이 택한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밤하늘의 푸른 달빛처럼 생존을 위한 잠깐의 위안일까. 나는 후자라고 믿고싶다. 그 편이 더 아름답기에.
한편으론 샤이론과 케빈의 외면은 당연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삶을 외면하고 생존의 길로 들어섰을때는 고작 16살도 되지않은 어린 소년이었을때이다. 인생에 기회가 흔히 찾아오진 않지만, 어떤 선택들은 삶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의 라스콜리노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선택은 그 인물에게 전혀 다른 우주를 열어준다. 그 우주에 발을 딛는 순간, 편입되는 순간 결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용서의 문제를 초월한 어떤 것이다. 회개를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혹 초월자에 의해 용서를 받거나 노파의 영혼적 존재가 나타나 용서를 직접 해준다 해도 죽은 노파를, 노파에게 앗아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기 때문이다. 샤이론을 이 상황에 넣고 상상해보자. 샤이론은 벼랑끝에 내몰린 생명체로서 사랑과 생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만일 사랑을 택하여 커밍아웃을 하고 괴물들과 당당히 맞서싸우려 했다고, 그런 선택을 했다고 가정하면 과연 그가 다음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의 선택의 불씨가 케빈에게 옮겨가 누군가가 케빈을 죽였다면? 그의 선택이 케빈의 시간을 앗아갔다고 자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삶을 그렇게 쉽게 담보하는 선택을 과연 용기있는 선택이라 칭할 수 있을까? 오히려 무책임한 행동은 아닐까?
영화는 Goodie mob의 기념비적 트랙, Cell therapy(해당 씬에서 아주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와 함께 살아남아 전혀 다른 우주로 들어간 블랙을 그리며 최종장을 향한다. 블랙은 아버지(라고 단정지어 부르고 싶다) 후안의 그림자를 쫓아 마약딜러가 되었다. 나는 모든 게토 지역내의 범죄자들이 마약 딜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딜러는 그 바닥에서 꽤 좋은 수입을 보장하고, 또 마약을 공급받기위해선 길거리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마약 딜러는 블랙,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간 길이다. 시스템이 종용하거나 걷어차서 어쩔 수 없이 간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전 범죄자(Ex-convict)로서 블랙은 왜 여러 길거리의 옵션 중 마약딜러를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의 선택이, 적어도 그가 놓인 길 위에서 바라보았을때 ‘인생은 고통’이라는 명제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후안은 어린 리틀의 인생에서 늘 위안이었다. 비록 극중 마지막으로 머리를 맞대었던 테이블씬에서 후안과 리틀의 이별이 암시 되는듯 했으나 이후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리틀이, 샤이론이, 그리고 블랙이 결코 후안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샤이론의 인생에서 케빈 외의 유일한 안식처였으니까 말이다. 어린 리틀이 마약 굴에 갇혀있었을때 구해준 사람도, 바다에서 같이 수영을 하며 그에게 세례의 은총을 내린 사람도 후안이었다. 그가 마이애미 해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면 이 사실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올 것이다.
“난 여기서 오래 살았어. 하지만 태어난곳은 쿠바란다. 쿠바엔 아주 많은 흑인들이 있어.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안될거야 넌. 나도 어릴땐 너처럼 조그만했어. 달밤에 신발도 신지않고 뛰어다녔지. 어느날인가, 내가 친구들이랑 놀다가 어떤 할머니옆을 뛰어가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붙잡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
“뛰어다니면서 달빛을 다 받아내는구나. 달빛아래에선 검은 아이들이 푸르게 변한단다. 넌 이제 블루야. 이제 그렇게 부르마, 블루”
“언젠가는 네가 어떤길을 가야할지 선택해야 될 때가 올거야. 절대 다른 사람이 그 선택을 하게 놔두지마”
그 노파에 말엔 슬픈 사실이 녹아있다. 검은 피부가 지니는 비밀 말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건 결코 흠이 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사람의 피부가 검은 것은 그 사람이 고통속에 있다는 것을 가리켜왔다. 그러니까 검은 소년들은 완전한 고통속에서 어떤 형태의 출구도 없이 시달리는 존재들이다. 다만 오직 달빛아래에서, 그러니까 그들의 피부가 푸르게 변할 때 그 고통을 하룻밤이라도 잠깐만 내려놓고 푸른 존재로서 위안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메타포 위에서 ‘나는 내 검은 피부가 자랑스럽다’는 멋진 선언이 과연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당신은 이런 생각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안은 샤이론의 엄마를 마약쟁이로 만든 사람인데, 샤이론의 인생을 추락시킨 사람인데 어찌 그가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의문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렇게 반론하고 싶다. ‘그밖에 후안이 할 수 있는게 도대체 뭔데?’ 삶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매우 제한되어있고, 유일한 대항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블랙이 마약딜러가 된 것 처럼-상식적으로 혹은 규범대로 따지면 이는 결코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역설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선택만이 존재하는 길 위에 놓인 사람들도 있다-그리고 그 고통을 최소화 시키려고 발버둥 치는것. 이것 말고 도대체 우리가 이 지옥같이 고통스럽고 역겹도록 우스운 인생에서 할 수 있는게 더 있긴 할까?
지금도 이 세상에는 사랑이나 삶 따위의 고결하고 높은 가치를 포기하고 생존이라는 기본적인것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당신도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샤이론은 그들 중 한명이며, 자신의 엄마를 타락시킨 범인이 후안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 하기위해 그의 자취를 쫓은 것이다. 샤이론과 후안, 그리고 어머니 파올라의 아이러니속에서 그들이 이 비극을 초월하기위해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초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되어, 출소 후 다른 우주에서 살던 블랙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오게되고 그의 우주는 다시 한번 더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은 기회일 수도 있고 또 한번의 위기일 수도 있다. 또 기회처럼 보이지만 기회라기 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찰나일수도 있다. 무엇이면 어떤가. 이 죽을만큼 쓰라리는 고통을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인생에 있어 값진 선물일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역겹고 우스운 곳이며 우리는 그 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본 리뷰는 2020년 6월 3일 작성되었고 개정하여 업로드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