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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Mar 17. 2021

작은 아씨들 리뷰

왜 기적은 늘 과거에만 존재하는지




소설은 영화와 다르다. 대부분의 소설 원작을 지닌 영화들이 비록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간다지만, 그 안에서도 감독은 자신만의 터치를 넣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한다. 가령 스콜세지의 <아이리쉬 맨> 속 캐릭터 페기 시런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책에서 페기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프랭크나 그를 인터뷰한 찰스 브랜트의 묘사를 통해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달랐다. 스콜세지는 페기를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로 창조했고, 일곱마디의 대사 외 매 순간을 침묵했음에도 그녀는 프랭크의 가장 아픈곳을 찌르고, 쥐고, 송두리째 흔드는 작품의 도덕적 중심(Moral center)으로 그가 죽는 그날까지 프랭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부에게 문을 닫지 말아달라 부탁한 것 역시 '페기'로 상징되는 자신의 과거에의 후회와, 용서에 대한 헛된 희망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영화의 막을 내리는 장면이 페기 시런이라는 캐릭터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뜻이고 즉, 스콜세지는 그 작품의 갈등의 시작부터 엔딩까지를 아우르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원작의 밑바닥으로부터 건져내어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은 이와는 다른 케이스이다. 물론 에피소드를 살짝 변화시키거나, 특히 에이미의 여성 권익에 대한 통찰이나 조가 여자학교를 설립하는것(원작에선 소년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등을 통해 감독의 여권에대한 생각을 불어넣었지만 나는 이것이 원작과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 작품은 참으로 정직한 영화이다. 비틀기나 확대, 부각 등 특별한 창조없이 소설을 통째로 가져다 시대에 맞게 다시 포장한 작품이며 그것은 감독의 역량부족 보다는 고전명작을 둘러싼 시간의 벽을 부순다는것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나는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원작을 대신할만한, 그러니까 영화를 보았다면 책을 다시 볼 필요를 못느끼게하는 완전한 영화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감상은 활자가 아닌 스크린 속 영상들이 이루는 서사들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운명" 과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영화는 잔뜩 긴장된 한 여인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신문사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사장과 일대일 면담을 갖는다. 그녀의 스토리를 팔기 위해서, 평균가보다 낮은 가격이지만 지면에 실리게된 것에 기뻐하며, 조세핀은 자신의 하숙집으로 뛰어간다. 이후부터 <작은 아씨들>은 현재의 4명의 아씨들의 모습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 하고있는 에이미, 작은 집에서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힘든 삶 속에서도 책임감을 잃지않는 메그. 텅 빈 방에서 홀로 남아 피아노를 치는 베스까지. 한컷씩 그들의 모습을 조명 한 뒤 영화는 7년전 밤으로 걸어간다. 그날 밤은 로맨스 스토리의 전형적인 밤이다. 주인공 조세핀은 무도회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운명의 사고로 같은 공간에 갇히게 되고 운명의 춤을 추며, 또 운명의 부상을 당해 운명의 도움을 받으며 상대방 역시 그 모든 시간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사랑이 곧 운명이라는듯 말하는 도입이다. 더 나아가 그 운명은 매번 짖궂은 장난을 한다. 로리는 첫 만남부터 조를 마음에 두었고 자신이 살아온 집, 엄숙한 할아버지의 얼굴로 뒤덮인 거대한 피라미드 속 삶과 정 반대의 조의 생기넘치는 장난들에 삶의 활력을 느끼며 사랑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녀는 신념으로 눈을 가린채 "운명"에 맞서는 투사인 듯 행동하며 그의 사랑을 거부하고, 동시에 조의 동생 에이미는 그 둘을 질투하며 몰래 로리를 사랑한다.


신념은 사랑앞에선 정말 보잘것 없고 초라한 것이며 눈을 가린 투사가 뒤뚱거리며 앞으로 돌진하는 그 모습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듯 어리석고 멍청하면서 우스울 따름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와 내 주변 혹은 우리는 대부분 조세핀처럼 행동하며 그것을 이상이라 착각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중 대다수가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결국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음을 나안으로 목도하고, 자신의 신념이 하잘 것 없었음을 깨닫는다. 왜 우리는 직접 보기전에 알지 못하는 것일까?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이 운명의 장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작품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하며 그 경계를 지속적으로 넘나드는데 조가 스스로의 눈을 가린 안대를 벗고 현실을 바라보았을때,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것이 사랑임을 깨달았을때, 로리와 에이미는 서로 결혼을 약속한다. 주목하는 점은 이부분인데 과연 로리가 에이미에게 한 청혼은 정말 사랑에서 우러나온 청혼이었을까? 에이미가 프레드 본의 청혼을 거절하고 로리와 약혼한것이 그녀가 그에게 말했던 ‘기품’을 지킨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 그녀는 로리의 첫번째 청혼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언니의 대체가 되고싶지않아. 이런 대접 받으려고 평생을 당신을 사랑한것이 아니야” 내 생각에 이 거절은 에이미가 추구하던 ‘기품’과 딱 맞아떨어지는 감정이었다. 간절히 원했던것이 잘못된 방향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다가왔을때 그것에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쉽지 않은일들을 하는 행동을 우리는 ‘기품’있다고 종종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품넘치던 그녀가 왜 갑자기 로리를 붙잡고 그에게 추파를 던진걸까. 분명 그녀는 로리의 마음이 리바운드(Rebounds)일거라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을것이다. 그럼에도 괜찮았던 걸까?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런데 궁금한게, 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운명인가? 아니면 몸과 몸이 같은 공간에 있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는 현실인가? 아니, 그 전에 이렇게 물어야겠다. 사랑은 하나의 형상인가?


만약 사랑이 운명이라면, 이 둘의 약혼은 사랑을 기반으로 성립된것이 아니다. 로리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는지 조에게 이렇게 돌려 말한다 “나는 너를 평생 사랑했지만 내가 에이미에게 느끼는 사랑은 네게 느꼈던것과 다른 거야” 만약 사랑이 현실이라면 또한, 위 대사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현실 속 사랑은 그런것이다. 여러가지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데이팅앱을 통해서, 소개를 통해서, 혹은 일방적 추파를 던지며 열렬히 구애하고 외모나 조건에 호감을 느껴 여러번 만나다가 서로의 몸을 섞고 그러면서 서로 얽히고 깊어지는 그런 형태들. 이 영역은 운명이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너무도 황량하고 좁고, 때론 지저분하다.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세핀이 이상의 안대를 벗고 현실을 깨달았듯이 로리와 에이미 또한 ‘기품’이나 ‘운명’같은 허울을 벗어던지고 서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라면? 그러니까 어쩌면 운명은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현실로 이끌고, 깨달았다고 생각했을때 돌이킬 수 없다고 못박는 그런 존재라면...사랑은 현실일 것이고 이 이야기는 운명의 로맨스보단 현실의 여러 얼굴로 등장하는 사랑의 민낯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근원적으로 작가의 욕구를 배출하기위해 창작된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가 되기위한 첫번째 원칙이라고 나는 믿는다. 또 창작자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예술이 대신하여 이루게 해줌으로써, 작품은 도피처이자 안식처가 된다. 때문에 그곳에는 진정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멜로드라마는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 가장 많이 나오는 장르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결코 스쳐간 옷깃정도의 인연이 아님을 증명하고싶기 때문일것이고 또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랑은 위대한 설계하에 이루어지는, 우주적 배경을 가지고있는 작용이라고 믿게하고 싶어서이겠지. 그리하여 독자들은 비로소 작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현실에서 꿈꾸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혼동하며 그 이야기를 예찬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여기에 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따라서, 작가가 아주 정교하게 설계한 로리와 조와 에이미의 운명적 사랑은 거짓이라고 믿는다. 작가의 욕구에 의해, 독자의 성원에 의해 가장된 것이다. 내가 믿는것은 그들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깨질때, 그 균열을 뚫고 바라보는 현실이다. 따라서, 나는 사랑은 현실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에이미와 로리의 약혼은 사랑에 기반한 것이다. 비록 그 단어가 운명에 기반했을때처럼 감동적이지 않을지라도 사랑은 사랑이다.


http://www.rene-magritte.com

운명과 사랑에대한 생각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정말 하고 싶었던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운명과 기적은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꾸고, 돌이켜 봤을때 다른 방식으로 우리 자취에 남아있다. 운명은 극복 가능하지만 이미 행해진 기적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현재의 우리를 좌절케한다. 그것이 기적의 댓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기적이 행해지던 그때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재의 조세핀을 좌절케한 과거의 기적들. 베스가 성홍열을 기적적으로 이겨내고, 아버지가 전쟁의 부상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돌아와 모두가 해피 크리스마스를 만끽하던 그때의 그 동화처럼 신비하고 놀라웠던 시간. 내가 진심으로 의문을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했던것은 이 것이다. 


“왜 기적은 늘 과거에만 존재하는가?” 


어째서 과거의 베스는 성홍열을 이겼으나 현재의 베스는 이겨내지 못했을까? 감독 그레타 거윅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색체와 톤을 조절해 과거와 현재를 구분했는데 과거는 황금빛 볕이 동화처럼 내리쬐는 아름답고 놀라운 시간이었고 현재는 늘 어두운 구름이 드리운 진청색의 세상이었다.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고작 100년의 시간이란 비할데도 없는 짧은 시간일텐데 그 중에서도 왜 기적은 늘 과거와 현재를 이처럼 가르고 우리가 지나온 길 이전에만 머물러있는걸까.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기적에도 유효기간이 있는건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해보면 우리가 태어나는것은 기적의 첫 시작이기도 하다. 수십억마리의 정자 중에 하나가 위대한 난자와 만나 지금 우리의 영혼을 담은 생명체로 자라나서 무사히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는것. 또, 과거는 얼마나 위험하고 어두웠는가? 

<미드나잇 인 파리>의 ‘골든에이지’라는 아이디어의 존재는 그 반대로 모든 시간대가(전쟁 등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면) 과거보다 발전하고 전진했음을 방증한다. 과거는 늘 지금보다 위험하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과거엔 납치가 성행했고, 연쇄살인이 심심하면 미디어에서 터져 나왔으며 밤거리는 퍽치기, 소매치기, 조폭, 폭주족들에 의해 점령되다시피 했었다. 지금처럼 시민의식이 성숙하지도 못했고 불과 10년-20년전만 하더라도 학교와 군대에서는 폭력이 허용되었던 시기였다. 그 시간을 뚫고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은것 역시 기적이다. 그리고 그 시간속에서 우리는 각자 특별한 기적에대한 기억을 지니고있다. 집이 망했다가 기적처럼 다시 가족들끼리 힘을 합쳐 행복해졌다거나, 가족 중 누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났다든가 하는 기적들 말이다.


나의 어린시절, 아주 작은 기적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어린시절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였다. 왜소한 몸에 인지체계가 발달되지 않았던 내 어린시절은 늘 나보다 더 성숙한 여러 무리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어떤 몸집이 큰 아이 A의 집에 끌려가 흠씬 두둘겨 맞은적이 있는데, 사실 아직도 그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 고문의 시간이 지나고 집에 오던 길에 길가에 있던 교회 앞 성인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모든걸 끝내달라'고. 그리고 집에가서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집전화로 전화 한통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은 내게 친구가 전화를 했다며 바꿔주었고 수화기 너머에는 나를 빨래마냥 두둘겼던 그녀석이 있었다. "미안하다"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이 역시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물론 이 일은 우주가 만들어낸 어떤 기적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때리던 장면을 그녀석의 가족 중 누군가가 보았고, 그 부분에 훈육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지금을 살며 이때를 추억한다. 내 인지세계 밖에서 일어난 이 기적같은 일이 다른 모습으로 다른 순간에 내게 한번쯤은 일어났음 좋겠다고. 하지만 이후 단 한번도 이런 기적은 반복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때 일정량의 기적을 가지고 태어나, 다 자라기까지 그 기적들을 시간에 나누어서 다 써버리는것 아닐까? 그게 과거의 베스가 성홍열을 이겼으나 현재의 베스는 성홍열을 이기지 못한 이유라면 어떨까. 그럼 기적을 다 소진한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흐르는가? 그 이후에 우리를 좌절케하는 어려움에 부딪혔을때 인생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작은 아씨들>에 따르면 조는 베스가 죽은 뒤 스스로 묶었던 안대를 벗고 현실로 나와 진짜 자신의 소설을 완성한다. 예술은 현실에 존재하는 유일한 안식이며 도피이다. 재밌는것은 그 안대를 벗긴것이 베스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 지점은 기적이 생을 다해버린 지점이며, 다시말해 어린시절 동화같던 삶의 기적이 끝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현실로 편입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동화가 아니기에 퍽퍽하고 늘 뒤돌아보면 어린시절의 기적이 그림자처럼 의미없이 붙어다니며 현재의 자신을 좌절케 한다. “왜 지금은 그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걸까” 왜냐하면 지금은 현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메그는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사는 인물이다.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신념에 사로잡힌적도 없으며, 질투심에 눈이멀어 허황을 쫒지도 않았다. 사교모임에 가서도 이 멋진 날이 오늘 밤이면 끝날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현명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눈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었으며 또 충분히 강인하여 그 현실을 감내할 힘이 있었다. 나는 베스에게 큰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메그만큼 현명하진 못했어도 조나 에이미 보다 훨씬 영혼이 깨끗했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을 감내할 보통의 힘 조차 없었고 결국 그렇게 일찍 저버린것이다. 베스가 죽은 뒤 세자매에겐 운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것은 어릴적 동화같던 기적과는 너무도 다르다. 화면 컬러톤은 새벽녘 동이 틀 무렵같은 네이비 필터로 처리되었으며 운의 내용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윗 세대의 죽음이 아랫 세대에게 기회가 되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어온 사실. 


나는 이것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남은 세 아씨들의 진짜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간순 상으로 조는 대고모에게 물려받은 집을 학교로 꾸미는데 자신의 책이 인쇄되는 과정과 교차편집된 학교에서의 가족파티 시퀀스는 과거 영광의 황금 컬러톤으로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적은 과거에만 머무르기에 나는 이것이 조세핀의 책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그녀의 도피처이자 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녀가 대고모로부터 집을 물려받고 학교를 차린것은 현실일 것이다. 말했다시피 세 자매가 대고모의 빈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씬은 푸른 필터의 어둡고 건조한 톤으로 연출되었고 나는 이 영화의 교차편집에서 색체가 시간을 구분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 세자매가 나눈 대화들은 모두 현실이다. 색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베스를 떠나보낸 현재의 가족의 일상이 다시 전 처럼 돌아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베스가 만들어낸 균열은 그 가족들이 생을 마감할때까지 아니, 마감하고서도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일 것이다. 학교를 열고 이전보다 나은 경제적 여유를 영위하면서도 여전히 베스와 과거의 기적들은 그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했을것이다. 인간이 그 균열을 뛰어넘기에는 우리의 다리는 너무 짧다. 이것이 인간이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라면 어떨까.


프리드리히가 집에 찾아와 떠나는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리드리히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베스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베스를 기리고 자신들을 위로한다. 그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며 문을 닫는 장면까지는 현실의 톤으로 푸르게 연출되며 세 자매가 마차를 타고 그를 쫒아가 역앞에서 그를 만나는 장면은 반짝이는 황금색의 과거의 톤을 사용한다. 마차안의 촛불, 역의 주홍 전구들이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구들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프리드리히를 붙잡고 결혼을 한것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그녀의 책에서만 존재하는 그녀의 안식인걸까? 영화는 두가지 방법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두 다리를 걸쳐놓는다. 우선, 신문사 사장과 조의 대화를 통해 그 둘의 결혼이 소설의 내용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한편, 프리드리히가 문을 닫고 나간 이후 조세핀을 부추기는 두 자매와 가족들의 밝은 모습들까지 푸른빛의 톤으로 연출하면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동시에 말하고 있기에 솔직히 나도 이 지점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소설 속 내용인지 확신하기 힘들다. 그녀는 프리드리히를 붙잡으러 갔을 수도 있고, 그를 보내고 다시 뉴욕으로 가서 신문사 사장을 만나 소설을 수정했을 수도 있다. 결혼을 하고, 학교에서 가족파티를 하는 마치 패밀리의 모습을 넣으면서 이야기를 끝냈을 수도 있다. 어떤것이 현실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건 그녀가 가린 눈을 뜨고, 기적이 끝나던 그 곳에서 베스를 위해 밤을 지세워 완성한 그 붉은 가죽의 책 <작은 아씨들> 만큼은 분명한 현실이다. 말했듯, 기적이 끝나는 곳에 늘 현실이 있고 현실 안에 예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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