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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Oct 06. 2022

<Life of Pi> 리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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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이 내게 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다. 강원도 GOP 철책을 바라보며 나는 얼마 남지않은 군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곳은 늘 북쪽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그럴 때 마다 철책 너머 흔들리는 그들이 보였고 어째서인지 자신들이 여기 있다고, 여기 나도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곧 전역을 앞둔 때였으며, 한창 모든 것에 예민했던 시기에 무언가를 배우고, 깨우쳐서 가야한다는 마음이 앞섰음이 틀림없었다.


<Life of Pi>의 인물 “Piscine patel” 혹은 “파이”는 종교에 관대한 어머니와 과학을 추종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 그의 고향 “Pondicherry [폰디체리]”에는 무슬림, 힌두 신전 그리고 절과 식민지 시절 건설된 교회가 한 데 섞여 있으면서 동시에 프랑스 자치령으로써 많은 과학 기술과 문화가 심어진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공간, 그런 시대에선 늘 스스로의 옳음을 주장하고 따르길 권하는 사람들과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도처에 있었을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는 어릴 적 겪은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반영된 과학을 신봉했고 합리를 추종했다. “합리”란 이치에 맞아 설명이 가능한 생각들을 일컫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늘 생존과 발전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파이는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한 합리라면 왜, 비합리적인 파이만 침몰하는 “TSIMTSUM[침춤]호”에서 살아남은 것일까. 폭풍이 휘몰아 칠땐 나가지 않고 안전한 곳에 숨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이겠으나 파이는 문 밖으로 몸을 던졌으며, 바람에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그런 그를 제외한 합리적인 사람들은 침춤호와 함께 모두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물론 나가려 했으나 이미 물이 차서 나갈 수 없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파이는 그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난 이 의견에도 분명 동의한다. 하지만 ‘운’ 이란 아이러니와 늘 등을 지고 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아이러니는 우연과는 다른 필연에서 기인한다. ‘의도치 않은’ 이라는 함의를 품고 있는 ‘운’과 ‘아이러니’는 행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행동과 의도는 늘 같이 움직이나 늘 같은 곳을 바라보진 않기 때문이다. 즉, 의도치 않게 밖으로 미리 나와 있던 것, 의도치 않게 폭풍우에 휩쓸린 후 “비슈누”의 무인도에 당도한 것, 이 모든 것이 파이가 합리의 길을 걸었다면 만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과연 합리의 시선에서 그의 생존을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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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 속, 빼곡한 나무들 중 왜 하필 내 바로 앞에 참나무가 서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태초에 그 땅위에는 참나무 말고도 버드나무, 소나무, 대나무 많은 종류의 씨앗들이 신이든 자연이든 무언가에 의해 심어졌을 것이고 어떤 나무든 그 자리에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참나무가 그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누군가 그 땅에 참나무 씨앗을 심었다는 점이다. 운도, 아이러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 생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시대, 그 공간, 그 순간에 그 인물의 생존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행동을 누군가 했기 때문이며 이는 필연의 길 위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남은것은 파이가 아닌 제3자, 감독 그리고 관객이 그 사건을 어떻게 설명 하는가이며 그것은 분명 상식과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파이가 태평양 한가운데서 다시 태풍을 만났을 때, 그는 또다시 숨기보단 맞섬을 택했다. 신에게 따져 물었다. 왜 나의 친구를 겁주느냐고. 왜 나에게서 모든것을 다 빼앗아 가 놓고서 또 무엇을 빼앗으려 다시 왔느냐고. 여기에 가장 편한 답은 불가지의 영역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다”는 대답. 하지만 나는 이 대답이 영 불편하다. 또 한 편으로는 그의 용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하다. 친구들 중 대화의 맥을 늘 끊어먹는 “원래 그래”를 남발하는, 그런 친구를 보는 듯하다. 그렇듯 불가지론은 어떤면에서는 무관심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옆 친구는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투영해 우리의 말들을 분석한다.


이미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숱한 배경과 해석을 낳은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런 해석들을 많이 접했다. “리차드 파커”는 파이의 자아이며, 요리사, 중국인 선원 그리고 어머니는 각각 하이에나와 얼룩말 그리고 오랜지쥬스를 의미한다고. 그 네 명은 끔찍한 사건들을 겪었고 선상에선 살인과 식인이 있었음에도 파이는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식인섬은 지친 파이에게 약간의 안식을 준 종교적 상징이며 실제로 그런것은 없었다고. 혹은 실제로 그런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이 작품은 파이의 모험이라는 큰 줄기위에 갖가지 종교적 상징이라는 과실을 품은 멋지고 교훈적인 이야기라는 해석말이다. 그리고 그런 해석은 따르는 사람들은 늘 이런말을 덧붙였던 것 같다. “인생이 원래 그런법이야”


아이작 뉴튼이 만류인력을 발견했을때, 세상의 진리를 파악했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런 그가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단지 거인의 어깨위에 올랐을 뿐이다” 그렇듯, 어떤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일지라도 혹은 그저 일상을 살아가며 매 달 이자에 허덕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은, 그 공간 그리고 그 시간, 그 순간에 볼 수 있는것이 제한적이다. 따라서 시야도 제한적이기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역시 제한적이다. 보는대로 믿고 믿는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이러한 관점으로는 그 광활한 파이의 모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불가지론이나 하나의 열쇠구멍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지나지 않는 이론적 분석이, 나는,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믿는다. 


내가 말하는 믿음을 진실로 그것이 진실이며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결론짓는 마음이다. 우리에겐 보지 않은 것을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회의가 든다. 따라서 본 대로 믿는다면, 우리가 따라간 작품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것은 어떨까. 분명 그럼에도 의심이 들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과 이야기가 그의 모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작자 “Yann Martel [얀 마텔]”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그리고 감독 “Lee Ang [이안]”의 마음이 이 지점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 의심을 버리고 본 대로 믿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당신은 당신이 목격한 위대한 장면을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두 창작자는 우리에게 위대하고 아름다운것을 믿기 위해선 스스로를 비워야 한다고 말하는것이 아닐까.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게으름을 비우고, 남들보다 더 잘나 보이려는 욕망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 본 것을 의심하고 왜곡하고 편집하지 않으며 그대로 믿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것을 가장 아름답게 이해하는 합리가 아닐까.


따라서 나는 파이가 비합리적인 길을 걸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을 비우지 못한 사람과 세상들의 관점에서 낙인찍힌 파이일 뿐이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비슈누의 입 안 속 우주를 받아들였고, 기도하는 무슬림 신도들이 만들어내는 평화로운 장면을 받아들인 것이며 흰두교 등 축제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저 받아드렸을 뿐이다. 파이는 아름다운것을 가장 아름답게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것이 파이의 모든 모험과 여정의 참나무 씨앗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도착한 이곳 캐나다에도 많은 참나무들이 공원과 길거리에 서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6시 경에 나는 공원에 나가 느긋한 담배 한 대를 피며 그들을 종종 바라본다. 어쩌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들이 뛰노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이 내게 어떤 말을 하기 위해 뛰어놀지 않는 것처럼 그저 이 참나무들도 서있을 뿐이며 내 선택과 행동의 결과가 이 머나먼 타지의 참나무와 나를 만나게 한 것이다. 나는 단지 어떤 말도 생각도 없이 아름다운 이 자체를 받아들이며 기억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받아들이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푸른 망망대해를 빙하처럼 떠다니는 하얀 구조선의 그림과 바닷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우주의 그림.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닌, 불교와 흰두교의 상징도 아닌 그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실체이며 진실 아닐까. 분명한것은 나는 그 그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그 아름다움을 기억할 것이다. 또 분명한것은 아주 극소수의 조난자만이 생존하여 귀환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뱅갈 호랑이와 함께 버티며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파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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