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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Oct 26. 2022

<Deconstructing Harry> 리뷰

사랑의 무게

notrecinema.com

두가지 사랑이 있다. 하나는 너무 무겁고 커다란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주머니에 들어갈 듯 작고 아담한 사랑이다. 작고 다루기 쉬운 사랑은 늘 우리의 머릿속에서 찢기고 오려지고, 다른것들과 덧대어져 변형된다. 이것은 마치 밀(Wheat)을 빵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밀을 빻아 제분하고, 그것을 다시 물과 함께 섞어 반죽을 자르고 구기고, 이어붙여 갖가지 맛있는 소스들을 섞는다. 그리고 오븐에 넣어 빵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나온 빵은 우리의 양식이 되며, 기억속에 남아 살아가는 재미를 준다. 반대로 너무 큰 사랑은 어떤가. 어떤이는 큰 사랑을 제단위에 올려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리며 성스럽게 보존하려하고, 또 어떤이는 그 거대함에 겁먹어 외면하고 도망친다. 그렇다면 이들 중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오직 신성한 것만이 사랑인가. 그렇다면 그 사랑은 왜 당신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것인가. 삶에 양식이 되는 빵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위해 누군가와의 시간을 멋대로 가공해, 빵을 먹는것이 자칫 이기적인 행동은 아닌가? 만약 누군가가 당신과의 시간을 자기기만적이고 이기적인 이야기로 다시 쓴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그 사람은 삶의 행복을 느낀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작품 <Deconstructing Harry>는 우디 앨런의 가장 알려지지않은 보석같은 영화일 것이다. 이 작품은 애니 홀, 맨하탄, 미드나잇 인 파리, 한나와 자매들처럼 유명하지도, 직접적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스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예술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이 가장 사랑과 예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Deconstructing Harry>는 우디 앨런이 작가로서 느끼는 모든것을 담고 있고 그 속에는 사랑과 예술에 대한 충만한 고민이 놓여 있다. 


영화는 해리 블록의 작품 속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동굴을 지나가는 작가로서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크게 보면 두명의 부인과 두명의 내연녀가 나오며 따라서 두 명의 남편이 등장한다. 두번째 부인인 조안과 그녀의 작품 속 인물, “데미 무어”가 연기한 헬렌. 세번째 부인인 제인과 내연녀이자 그녀의 동생인 루시를 작품으로 담아낸 제닛과 레즐리. 그리고 그의 진정한 사랑이라 일컫어지는 마지막 내연녀, 페이. 여기에 단편 유머스토리로써 등장하는 첫번째 부인과 그의 남편이자 “토비 메과이어”가 연기한 하비,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멜(“로빈 윌리엄스” 분)까지. 정말 십 수 명의 캐릭터들이 한 데 뒤 섞여 등장하며 그 규모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는것으로 유명한  헐리우드 팀업 무비나, 한국의 최동훈표 하이스트 무비 등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수 많은 스타들을 하나의 종착지로 모으는 강력한 중력을 지니고 있다. 


이 힘이 수 많은 캐릭터들을 내세우고도 한 순간의 산만함도 없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루고 한 데 모이는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해리 블록의 상황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울을 치워버리면 남는 이야기는 주인공 해리 블록이 조안, 제닛과 레즐리 그리고 페이를 거쳐서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는 아주 단순한 네러티브일 뿐이며 관객은 엔딩에 다달아서야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모습만이 남은 해리를 바라보며 모든것이 자명해지는 유레카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좀 더 깊게 <Deconstructing Harry>를 해체해보자. 나는 앞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우디 앨런의 생각을 담고 있다 말한 바 있다. 만약 바로 위 말한대로, 해리 블록이 여러 여인들을 거쳐 한 곳으로 향하는 단순한 네러티브라면 보편적으로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인물의 성장을 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편성을 갖지 않고 무엇보다 우디 앨런의 영화이기에, 이 수식어 하나 만으로 그 어떤 작품들과도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예컨데, 이 영화는 해리의 자취를 쫓으나 해리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벌어지는 현실들과 해리가 상호작용 하지도 않으며, 그에겐 그럴 의지 조차 없다.  상담가 조안과의 결혼생활이 해리에게 준 것은 아들 힐리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조안은 데미 무어의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환자들과 사적으로 어울린다. 그리고 유대교에 점점 심취하게 되는데 환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사실 해리가 조안의 환자였던 에이미(작품속에는 이름으로만 등장한다)와 바람을 폈던 기억과 신실한 유대인인 여동생 부부에 대한 기억을 자르고 이어붙여 얽어낸 모습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그의 단편 에피소드 “Max Pinchus’ dark secret”에선 아버지가 사실은 어머니와 결혼하기전 플로리다에서 가족을 이루고 그로서리를 운영했고 자식까지 있었으며, 윗집의 미망인과 바람이 나서 부인을 죽이고 시체를 은폐하기위해 식인행위까지 했었다는 식으로 아버지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해리를 출산하며 사망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를 모질게 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그의 감정이 반영된 이야기일 뿐이며, 결국 아버지를 용서하고 천국 대신 중식당으로 모신다. 유대교엔 천국이 없기 때문이다. 


조안과 해리 사이에는 해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힐리가 있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르쳐주길 원했고, 그것이 때론 너무 적나라하고 솔직하여 주변사람들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어쩌면 해리의 방탕한 일상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해리의 그런 교육이 아이들을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했음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힐리를 사랑했다. 악마가 페이를 지옥으로 납치했듯, 해리는 자신의 학위 수여식에서 학위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기위해 힐리를 납치한다. 


작품의 줄기가 되는 이 납치의 여정에는 전 날 밤에 불렀던 다정한 매춘부 쿠키와 약에 취해 불러내놓고도 아침까지 완전히 까먹어버린 심장이 약한 친구, 리차드도 함께한다. 이 여정은 결코 로드무비의 성격을 갖지도 않으며 성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여정은 리차드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해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서 그나마 남아있던 삶의 모든것을 다 빼앗아간다. 납치행위가 발각되어 경찰서로 끌려가고, 학위는 수여받지도 못했고 힐리는 이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며 페이는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해리를 떠나며 그의 모든것을 붕괴시킨다. 어쩌면 그는 더 깊고 어두운 곳(Deep shit)으로 떨어져 지금보다 더 많은 약과 술과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는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디 앨런은 여기서 죽은 리차드의 입을 빌어 한가지 화두를 던진다. 


“죽음이 삶 보다 나은 단 한가지는 배심원단에 불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뿐이야” 


페이의 보석금 지불로 풀려난 그는 술과 약 대신 의자에 앉는다. 꿈을 꾸며 타자기에 손을 얹는다. 그 꿈은 비록 페이와의 재결합을 그리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던것을 가장 멋진 방법으로 완성시켜준다. 살아 가던 그를 마저 살아가게 한다. 해리는 그곳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의 모습이 반영된 수많은 캐릭터들, 짧은 여러편의 이야기들은 여러 사랑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코 그를 사랑으로 이끌진 않는다. 


작품 <Deconstructing Harry>는 말 그대로 해리를 해체하며, 겹겹이 얽어지고 꿰매어 콜라쥬 되어있는 가면들을 벗겨내고 그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해리의 아름다운 진짜 얼굴, 예술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목놓아 찾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정의 내리지 못한다. 얇고 피상적인 느낌을 따라 몸을 의탁하고 자신이 찾은 결과에 생각없이 안주할 뿐이다. 나는 지금껏 그러한 일상적인 방식을 따르면서도, 한편 진정한 사랑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것이 무게나 규모 혹은 질량에 있진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사랑에 질량이 있을리 만무하며, 혹은 느껴지는 무게감으로 이를 판단하기엔 생각해보니 진정한 사랑의 토대를 마련하는 ‘진심’에는 실체가 있지 않다. 마치 구름처럼 말이다. 



MoMA.org

작은 구름과 큰 구름은 바람에 이끌려 찢어지고 다시 이어져 큰 구름과 작은구름으로 바뀌기도 하고, 또 하나의 구름이 되기도 한다. 큰 구름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은 바닥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기도 하며, 어두운 환경으로 겁에 질리게도 한다. 하지만 잠시뿐이지 않는가. 결국 바람을 따라 다른곳으로 갈 것이고 그 자리엔 따스한 볕이 내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혹은 도피할 수 있는 예술일 것이다. 그 곳은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로 작용되는 곳이며 따뜻한 볕 아래에서만이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비록 그럼에도 나도 사랑을 믿고 싶다. 진정한 사랑이 나를 구원할 것이고 용기를 주고, 성장시킬 것이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믿고 싶다. 믿고 싶기에 늘 고통스럽고, 때문에 늘 도망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커다란 먹구름들이 다가오며 어두운 그림자들을 드리운다.  곧 비가 올 것 같다.

어디든 비를 피할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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