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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Oct 08. 2022

<Annie Hall> 리뷰

달걀 그리고 와인



같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따로 존재하는 개념들이 있다. 전쟁과 평화는 늘 상반되지만 때론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너무 평화로워 전쟁을 벌이는 자들도 있다. 혹은 전쟁으로 진짜 평화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사랑과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통해 인간은 안주하기도 하며 동시에 사랑에 실패하면서 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사랑과 성장을 겪어야만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따라서 자연스레 나의 궁금증은 한 물음으로 향한다. “사랑과 성장, 둘 다 성공하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에 우디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둘 다 실패하고도 살아가는 방법은 있다”고.



영화의 제목 <애니 홀>은 알비 싱어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다. 이 영화는 70년도에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게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데, 예를 들면 극의 시작을 혼잣말(Soliloquy)이라는 연극 기법으로 시작해 나레이션과 함께 끝이나고 영화 중간에 4의 벽을 수시로 부숴버린다. 몬티파이썬의 <성배>가 나온 지 정확히 2년 뒤 상영된 이 작품은 코미디의 고전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 곳곳에서 초현실적인 유머들을 구사하며 서로 나란히 70년대의 위대한 코미디영화로서 남았다. 


한가지 예를 들면 알비가 애니의 집에 방문해 그녀의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를 짚어 볼 수 있다. 그는 혼잣말로 관객들에게 자신의 가족들의 모습을 설명하며, 그 주장을 보강하기위해 화면을 2분할 해 스크린에 두 가족의 식사 장면을 띄운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되게 양가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60-70년대 나왔던 영화들이 대부분 고전적인 네러티브를 가진 이야기들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애니 홀>은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품에 대한 고리타분한 예찬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지금부턴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생각들을 말해보고 싶다. 어차피 내가 칭찬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위대한 고전으로 남을 것이고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아도 재밌고 아름다운 작품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먼저 알비가 한 관계에 대한 농담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는 영화 오프닝과 엔딩에서 완전히 상반된 농담을 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알비는 "막스 브라더스"로 유명한 코미디언 "그라우초 막스"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나같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 절대 가입하지 않을거야
 이 농담은 지금 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야


작품의 맥락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그 농담은 알비의 첫번째 부인 앨리슨 포치닉과 헤어질 때 비로소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앨리슨은 그와 모든 것이 일치하는 여성이었다. 지적이고 많이 배웠으며 같은 유대계에 뉴욕을 사랑하는 뉴요커로서, 정치색 마저 같았다.(이 둘이 처음 만난곳을 생각하면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 단 하나 둘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앨리슨은 어리지만 성숙했고 알비는 어리지도 않고 성숙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둘 사이엔 사랑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농담을 근거로 밀어내는 남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그녀와의 섹스를 피하기위해 케네디의 암살을 이용했으며 앨리슨이 이에 대해 정곡을 찌르자 농담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따라서 이것은 변명일 뿐이었으며 처음부터 둘 간에 사랑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두번째 결혼에서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한 변명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는 노력아닌 노력을 한다. 그의 두번째 아내 로빈은 뉴욕의 전형적인 상류층 뉴요커이며 미디어와 사교활동을 즐기는 지적인 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알비는 의식적으로 반지능주의적인 행동들을 보인다. 예를 들면 사교 모임에 참석한 교수들과 기자들을 ‘이질(Dysentery)’에 빗대 모든곳에 태클이나 거는 자들이라 비웃으며, 빈 방으로 들어가 농구팀 뉴욕 닉스의 경기를 시청한다. 또 그의 부인이 그를 찾으러 들어오자 ‘몸은 솔직하다’며 파티가 열리는 와중에 섹스를 시도한다. 이런 모습은 다른사람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기 싫어 테니스 경기 후 씻지도 않고 오는 알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부부가 잠자리를 가질 때 로빈은 도시의 사이렌소리에 집중을 못하게 돼 그를 밀쳐낸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은 한적한 근교에서 살길 원한다고 말한다. 이에 알비는 자신은 뉴욕을 떠나선 결코 살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 샤워실로 향한다.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작 중 두번째 결혼생활은 끝이 난다. 알비는 대체 왜 뉴욕을 떠나려 하지 않은걸까? 이후 애니와 헤어지는 것 역시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갈림길에서 방점을 찍는다.


애니는 토니와 함께 음반 작업을 하기위해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는 추운 겨울의 뉴욕을 떠나 햇살 가득한 캘리포니아로 가려고 했고, 그녀를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했던 알비는 그 집착을 이기지 못해 그녀 대신 뉴욕을 선택한다. 그에게 뉴욕이란 어떤곳일까? 무엇이 그를 뉴욕에서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게 만든걸까? 


나는 그 정답이 미성숙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성숙함은 때로 자기애와 동의어이다. 자기애에 깊게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또 현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의 사랑이란 희생과 결합의 합성어이다.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덜어냈을때 비로소 나를 채워주는 사람과 만나 결합하게 되는것이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희생할 수도 없고 따라서 사랑을 완성할 수도 없다. 그렇게 다만 예술을 할 뿐이다. 예술은 왜곡된 자신의 탈출구이며 도피처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뉴욕을 떠나지 않고도 그가 원하는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현실이 아니더라도, 아니 애초에, 현실에선 결코 불가능한 것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극장아니겠는가? 


애니와 헤어진 후 길거리를 떠돌며 하소연을 하던 알비는 결국 극장으로 들어가 자신의 첫 연극작품을 제작한다. 그 작품에서 알비는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이며 애니는 그러한 그의 모습을 못이기고 알비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말이 안되지 않냐고? 뭐 어때, 그의 말대로 이건 자신의 첫 작품일 뿐인데.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으나, 예술을 통해 성숙해 질 수 있을까? 이 말을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비추어본다면 ‘도망친 땅에도 꽃을 피는가’라는 구절과 동치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도망 치면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성장과 성숙은 약간 다르지 않은가? 포도나무가 자라는 것과 와인을 만들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명백히 다르다. 포도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땅에 박고 거친 세월을 버텨내 좋은 훌륭한 포도를 끊임없이 탄생시키지만 와인을 땅에 뿌린다고 해서 새로운 와인이 생기진 않는다. 와인은 그저 어두운 셀러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그렇게 와인은 숙성된다. 만약 성숙이라는 개념을 잘 살아가는 맥락위에 올려놓는다면, 비록 사랑과 성장 모두를 실패해도 또 잘 살아가는 법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우디앨런은 다음의 ‘오래된 농담’으로 그 방법을 제시한다.


한 남자가 정신과를 찾아가서 말하길, 선생님 제 동생이 미쳤어요. 자신이 닭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의사가 뭐 그럼 아니라고 말해주면 되지 않겠소? 라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네 그렇긴한데 제가 달걀이 필요해서요


알비는 영화의 엔딩시퀀스에서 등장한 오래된 농담이 자신의 이성관계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라고 고백한다. 오프닝에서 말했던 그라우초 막스의 농담과는 분명히 달라진 구석이 엿보인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완전히 말도안되고 미쳤고 우스꽝스럽죠 그래도 계속 이대로 살아가야 될거 같아요. 왜냐면 우리 모두 달걀이 필요하니까요


작 중 알비는 내내 자신의 미성숙함을 부정하려 했다. 자기 중심적이면서도 어려운 학술적인 개념들이나 유머를 가장한 복잡한 변명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돌렸고 혹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했다. 끝내 자신이 견지하던 쿨하고 지성적인 태도마저 차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애니에게 사랑을 구걸한 그 결과가 철장신세라는걸 깨달았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 생각엔 자신을 탓하거나 내려놓기보다, 차라리 사랑을 내려놓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뉴욕으로 돌아와 예술로 도망친 것이다. 자신의 로맨스를 바탕으로 연극을 제작하면서, 무대위에서 리허설을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아마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말도안되고 미쳤었으며, 우스꽝스러웠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을것이다. 


그리고 독백하길, 뉴욕의 식당에서 다시 만난 애니와 대화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되었다고 말했다. 사랑을 내려놓고 예술의 세계로 도망친 그가 자신의 미성숙함을 직접 목도하며, 부끄러움에 자신의 모습을 고쳐쓰며 비로소 보지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장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받아들인 점. 이것을 잘 살아가는 맥락위의 성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술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것은, 예술이란 와인을 땅에 뿌리면 새로운 것들이 자라난다. 누군가는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예술을 통해 그저 취하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알비가 도망쳤으면서도, 성장을 외면한채 미성숙한채로도 성숙할 수 있었던 이유 아닐까?


작품 <애니 홀>에는 아름다운 뉴욕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눈 여겨본 것은 밤의 뉴욕과 아침의 뉴욕이다. 해가 저무는 밤의 도시는 모든것을 잊고 사랑에 빠지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뉴욕의 해변가를 거닐며 로맨스 영화 사상 최고의 대사 중 하나인 “La-di-da”를 자아낸 곳도 뿌연 매연에 산란하는 빛들을 등지고 “Loave you, loff you”를 떠들던 곳도 모두 밤의 뉴욕이었다. 반대로 시고니 위버가 분한 데이트여인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랍스터 소동을 겪은 후 애니에 대한 미련과 후회를 안고 찾았던 곳은 너무도 맑고 청명했던 아침의 뉴욕이었다. 


겨울 아침의 조용한 도시는 겉보기엔 쾌청하나 그 속에서 살게 될때 비로소 그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 폐를 찌르는 날카로운 바람과 건물들, 지나가는 사람들, 도로위를 달리는 차들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기에, 우리는 겨울 아침에 현실도 돌아올 수 밖에 없다. 명절 새해 아침에 고속도로가 아닌 서울 도심을 이동한 적이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아침의 도시는 투명하다 못해 우리 자신의 속내까지 감추거나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든다. 투명해진 속은 한 해가 의미없이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다가올 미래의 걱정들 마저 명확하게 보여주므로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날엔 망각보단 두려움이, 사랑보다 후회가 어울린다. 알비는 그 겨울, 아침의 도시에 압도되어 다른 여자들이 아닌 애니에게 돌아갔다. 다만 한가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다. 현실을 벗어난 소수를 제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현실을 살고 있을텐데 고작 돌아왔다고 보상을 주는것은 결코 현실답지 못하다. 결국 그는 애니에게 거절을 당하고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이렇듯 현실과 사랑 그리고 성장과 성숙은 나란하면서도 꼬여 있는 개념들처럼 보인다. 이 개념들에 대해 더 이상의 생각을 전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만약 이 세가지의 것들을 모두 성취할 수 없다면, 모두 외면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우디앨런이 제시한 해답이고, 그 답이 예술에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알비는 자신의 연극이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에 만족했고 숙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니를 다시만나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진짜 사랑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술에서 시작되었기에, 어쨌든 달걀이 필요하기에 일단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알비는 살기위해 예술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어쨌든 잘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가끔은 살기위해 영화를 본다. 어쨌든 달걀은 필요하니까.






(이 글은 2020.5월20일에 작성되었고, 퇴고하여 업로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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