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의 역설

몰랐던 행복과 모를 수 있었던 불행 사이에서

by 고진오

'과거로 돌아간다면' '돌아가고픈 순간이 있다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이러한 가정법은 주로 가볍게 시작하지만, 내재된 의미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우리는 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까. 비트코인을 매수하겠다는 세속적 욕망부터, 포기한 꿈을 좇겠다는 자기 충족적 욕망까지 그 이유는 다양하다. 물론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 과거이니, 기회가 있다 한들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적잖게 있어 보인다. 혹은 자신은 후회 같은 유약한 생각 따위 안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다소 현대 자기계발서스러운 선언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 무엇이든 과거로 돌아간다는 상상 하나로 사람들은 본인의 삶을 회고한다. 걸어온 발자취에 새겨진 선택들을 되돌아보고 소망과 현실의 괴리를 따져가며 결정하는 회귀, 그 결과가 무엇이든 결국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듯하다. 과거 주저했던 행동을 바로잡겠다는 사람도, 후회없이 지금의 삶에 만족하겠다는 사람도 결국은 삶에의 의미에서 핵심적인 가치는 행복이다. 그렇다면 사실 서두의 가정은 이렇게 갈음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한가?'


이 접근이 행복의 정도와 회귀 성향이 반비례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행복하지만 과거를, 불행하지만 현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삶의 서사와 행복의 인지적 연결 그 자체이다. 회귀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 철저한 사고 실험이기에, 그것의 목표는 행위보다는 과정에서의 부산물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얻은 것은 삶의 야속한 성질, 그러면서도 안락을 주는 모순이었다.


중학교 1학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아마 '초등학생 때가 좋았어' 아닐까. 그러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오히려 중학교를 그리는 희한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그것은 대학 신입생, 사회초년생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미리 겪어본 세대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때가 제일 좋은 때'라며 그 순간을 즐기라 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가 좋았다는 느낌 내지 감정은 반드시 후행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부의 후불적 가치 태동이 삶의 야속함을 만들어낸다. 평생을 바라던 가치를 알고 보니 평생 가지고 있었다는 이 아이러니함은 우리를 눈 뜬 맹인으로 만든다. 아무리 카르페디엠이라 외치며 현재를 즐긴다 해도, 종국에 그 진실된 가치는 뒤늦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모질지만은 않다.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야속함이 오히려 우리를 안락하게 해주는 보호막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나이와 삶의 무게는 비례하기 마련이다. 삶의 점진적 과부하가 일어날 때 이전에 들었던 가벼운 무게가 체감되며 때늦은 회귀적 행복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가벼운 무게'가 부상은 방지해준다. 삶의 고난과 현실의 부조리를 알아가며 생기는 고통은 공허와 결핍을 낳곤 한다. 배움이 화를 부르고 아는 것이 독이 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인생은 이러한 고행길을 미리 겪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리기에 용인되고, 어리기에 몰랐던 수많은 것들은 누리며 살아왔다.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그것이 인생이 선사한 역설적 선물인 셈이다. 이제는 원치 않지만 알아야 하는 일과 알고 싶지만 몰라야 하는 일이 산재되어 들이닥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회귀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결국 회귀를 경계하는 편이다. 행복을 되찾기 위한 회귀가, 오히려 잠자던 불행을 깨우는 일이라면 그것을 어찌 종용할 수 있을까. 그때는 몰랐기에 좋았던 것이다. 단지 코인을 하고, 테슬라 주식을 매수하고, 복권 당첨을 위해서 회귀를 원한다면 인생의 구심점을 재고해봐야 한다. 사랑과 꿈과 같은 내재적 가치를 좇기 위해서라면, 미완의 부재로는 완결될 수 없는 경험 가치들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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