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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l 12. 2020

[연극] 라스트 세션



연극 : 라스트 세션

공연장소 : 예스24스테이지 3관

공연기간 : 2020년 7월 10일 ~ 2020년 9월 13일

관람시간 : 2020년 7월 11일 오후 3시




      공연 전날 저녁, 집 안에서 어이없이 미끄러져 딱딱한 직각 모서리에 머리를 찍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피가 철철 흘렀기 때문에 나는 혼비백산해서 응급실로 달려갔다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했지만 혹시 두통, 구토, 발열, 부어오르는 증상 등이 있으면 즉시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다. 예전에 머리를 부딪힌 사람이 병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설사 아무 이상이 없다 해도 몸살과 두통이 심해지면 연극은 보러 갈 수 없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숨 잘 자고 나자 (놀랍게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컨디션이 좋아져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공연장으로 향했다. 머리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부상투혼까지 감행하며 보러 가는 연극이니만치 꼭 재밌어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우기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이 연극을 꽤나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인공이 무려 '프로이트'니 말이다.

     지난번에 보았던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연극에 이어 이번 연극도 무대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무대는 프로이트의 서재이자 치료실이었는데 가구부터 소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장식품들이 수십 개나 진열되어 있어서 놀라웠다. 사실 요즘에는 이렇게 사실적으로 재현된 무대가 드물었고, 나 역시 이렇게 사실적으로 재현된 무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 왜냐하면 나는 연극이 스스로 자학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 어쨌거나 이런 무대는 이런 무대 나름의 맛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현실적인 몰입이 이 연극에서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 연극은 재미있었다고 하기에도 재미없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것은 너무 많은 의견과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연극 자체가 참으로 애매했기 때문이다. 연극은 '프로이트-무신론자'와 '루이스-유신론자'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 인물들의 의견과 인격이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논쟁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심도 있게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편화되어 둘 사이에 대비각을 세우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물론 연극이 학문 세미나는 아니니 그들의 학문 세계를 구체적으로 옮길 수는 없겠지만 최고 지성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평이하고 그들의 논리가 너무 단편적이어서 과연 이 연극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실이 문학적으로 각색될 때에는 현실 이상의, 혹은 현실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희곡은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삶과 학문을 요약하고 나열하고 이어 붙이는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이 희곡의 가장 큰 문제는 치명적일 정도로 빈약한 상상력, 상상력의 부재였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실존인물을 다루는 소설, 연극,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예술이 현실의 비위를 맞추느라 비굴해지고 오히려 현실보다 더 시들해져서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뿐이었다면 나는 '재미있었다고 하기에도 재미없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재미없었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만큼은 꽤나 직설적이니까. 분명 이 연극에도 흥미로운 점이 꽤 있었다. 우선 무엇보다 공연 시간 내내 끊임없이 물고 물리며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자체가 그랬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그 대화는 평이하고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엄청난 대사량은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지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러다 보니 연극이 대화 밑으로 가라앉아버리고 '말잔치'가 되어버린 경향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대사량의 많은 걸 단점으로 보지 않으며 (단점으로 보는 사람도 많지만) 오히려 어느 수준 이상으로 대사량이 많아지면 약간 도착적인 쾌감마저 느낀다. 그리하여 '대사'로 꽉 찬 이 무대는 언어에 집중하게 해 주는데 그것은 정신분석이 '언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프로이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연극에서 인상적인 점은 인간의 '모순'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나는 '모순'이야말로 진정한 이 연극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자신의 반대자인 서로와 치열하게 대화하면서 자신의 모순과 대면하게 된다. 자신의 모순을 비교적 솔직히 받아들이는 쪽은 '루이스'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것,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이 세계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해 불가한 모순을 신에게 돌리는데, 어쩌면 그것이 루이스가 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붕괴할 것이라는 걸 루이스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모순을, 이 세계의 모순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 세계는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뿐이며, 그것은 그저 앞으로 밝혀나가야 할 미개척지일 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세계에서는 신이 설 자리가 없다. 프로이트는 이성의 이름으로 과거의 신을 몰아내고 스스로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 한다.  그러나 연극은 프로이트의 개성과 삶 속에서 다양한 모순들을 들어냄으로써 그 역시 (당연하고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놀랍도록 지적이고 과학적이지만 또한 놀라울 정도로 나약하고 감상적인 인간. 사실 인간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이성적인 태도인데,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미신적인 태도인 것과 같다. 말하자면 인간은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실은 '모순 그 자체'이다.  모순은 인간의 근원이자 본질인 것이다. 인간은 동물에서 자신을 분리한 그 순간부터, 아니 오히려 동물에서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이 세계를 인간 안에 억지로 쑤셔 넣기 위해, 자기 자신을 뒤틀어버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뒤틀림으로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그러한 인간의 모순을 간직하고, 들어내고, 재생산하는 것이 신, 신화, 예술이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모순을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것, 나아가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는 더 원론적인 존재론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연극 속의) 프로이트는 종교를 마치 속임수나 타락인 것처럼 취급하지만, 사실 종교 없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설사 모든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연극 속에서 프로이트 자신이 제일 잘 보여주고 있는 데, 프로이트가 단지 '수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수많은 종교적 성물들은 실은 그의 '부적'이 아니었을까.      

     또 한 가지 이 연극의 매력이자 아마도 이 연극의 성공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관계 설정일 것이다. 그 둘은 톰와 제리, 부모와 자식, 친구와 적, 연인 혹은 부부 사이 같은 케미를 보여주며 가까워지고 반목하기를 되풀이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반복적이어서 지루한 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격하고 사랑하고 경멸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들의 의견과 인격이 지나치게 대중화되고 일반화되었다는 불만은 앞에서 말했듯이 큰 결점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지적 시트콤 같은 재미가 있는 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연극에 큰 점수를 줄 수는 없을 듯하다. 위에서 나열한 장점과 단점 중에 개인적으로는 단점이 더 우세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다른 연극에서 보기 힘든 장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프로이트의 책을 읽어보다가 포기했는데, 그가 과도할 정도로 '성'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유치할 지경이어서  정신분석을 받아야 할 환자가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그가 '성' 만큼이나 중요한 인간적 조건인 '권력'을 등한시 하는 것에 실망한 나는 책을 놓아버렸다. 나는 나의 그런 미숙함과 경솔함을 후회하고 있는 데, 독서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이라는 걸 지금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단점들에 집착한 나머지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그 수많은 즐거움과 심오함들을 다 놓치고 말았다.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나는 모든 예술이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에 대한 이 연극에서 '프로이트'라는 무게를 덜어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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