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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29. 2020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연극 :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공연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공연기간 : 2020년 6월 16일 ~ 2020년 9월 6일

관람시간 : 2020년 6월 28일 오후 2시





     공연장에 들어서자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관객석 가운데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관객들이 마주 보는 형식인데, 이런 정적인 연극에서 굳이 이런 무대를 쓰는 걸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선을 다원화시키고 무대를 입체화하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어차피 내 시선은 고정되어 있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공연의 반을 배우 뒤통수나 보고 있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괜히 두 번 관람을 유도하는 상업적인 술수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무대는 거실과 부엌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보기 드물게 설정이 사실적이었다. 사실 이 정도로 현실감 있게 꾸며져 있는 무대는 개인적으로 처음인 듯싶었다. 거실에는 양탄자, 전등, 사진 액자, 화분, 책, 시계, 축음기,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이 가득했고 부엌에는 냉장고, 싱크대, 양념통, 도마, 가스레인지, 유리컵, 주전자, 손 닦는 수건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공연 도중에 등장인물들은 진짜 야채로 만든 샐러드며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차려놓기도 했다. 무대 위에 이 정도로 현실감을 부여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이 공연은 이야기 안에 온전히 몰입하는 '정극'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무대 장식들은 단지 현실감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미리 결말을 말하자면 그 현실감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였다.

     이 연극의 이야기는 다소 복잡해 보이기는 해도 사실 굉장히 단순하다. 이야기가 여러 가지를 건드리며 뻗어나가지만 나는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사실 가해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다소 진부한 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너무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왔다. 계급갈등, 남녀갈등, 세대갈등, 자본주의와 기회주의... 이것들은 중요하고 또 상당히 흥미롭긴 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지나쳐 가려한다. 사실 남녀갈등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게 다룰 여지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녀갈등이 아니라 '남성적 폭력성'인데 (정확히 어떤 단어를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성'적'이라는 애매함 대신 남성'의'라고 직시하는 편이 나은 지도 모른다.) 나는 이 연극에서 '남성적 폭력성'이 주제라기보다는 이 사건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바로 그 조건이야말로 (그것이 사건의 조건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이야말로) 기저에 숨겨진 핵심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분명 그것을 가닥으로 잡고 글을 써도 의미 있고 재미있는 글 한편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단 이 연극에서는 사건을 시작하고 (엘레나 선생님이 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작) 사건의 결말짓기 위한 (여학생 '랄랴'가 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말) 하나의 장치였다고 보는 쪽이라서 이 정도로 넘어가겠다. 내가 이 연극에서 보다 흥미롭게 보았던 점을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연극은 가해자에게 꽤나 많은 대사를 허락함으로써 그들이 실컷 말하도록 배려한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고 나름의 명분이 있다. 그것이 설사 개소리라고 해도 우리는 순간 그들에게 몰입하게 되고 일면 설득되며 도덕적 기준에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 그러나 그것은 또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얘기들이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옳고 그르고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 진부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멋대로 거침없이 말함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악이란 이토록 정당한 것이다. 악이 선만큼이나 정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선이 어떻게 악에게 반격할 것인가, 더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논리로 어떻게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인가, 선이 어떻게 악에게 승리하고 영광을 되찾을 것인가 두 손 모아 고대하게 된다. 그러나 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악을 방치한다. 별안간 무대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된다. 이제 무대 위에는 악만이 남아있다. 도대체 선이 빠진 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대사가 없는 배우들과 같다. 악은 그 누구보다 선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선한 자보다 더 절대적인 선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악은 별안간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악의 붕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악이야말로 선이 내부에서 붕괴했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혁명, 이념, 도덕, 규율, 이상향이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면서 위선, 가식, 거짓, 겉치레, 희생, 구질구질함이 된다. 신도, 이념도, 국가도, 도덕도, 명예도 사라지고 모든 기준이 무의미해진 가운데 영혼의 부모가 없는 시대적 고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선은 그들을 악이라고 규정하며 심판하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전혀 다른 존재일까? 악이 선을 향해 부모라고 부르며 당당히 유산 상속을 요구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연극은 선이 내부에서부터 붕괴하여 악이 되고 다시 그 악이 내부에서부터 붕괴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 악이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면 결국 무엇이 되는 걸까. 연극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다시 시작할 수도 혹은 그대로 버려질 수도 있는 폐허를 보여줄 뿐.

     마지막으로 나는 극 중에서 4명의 아이들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발로쟈'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사실 이런 캐릭터 역시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자기실현과 만족, 유희를 위해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며 불의와 범죄를 조장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냉혈한 엘리트 인간. 그러나 이 연극이 끝을 향해 치달을 때쯤이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지도자는 어떻게 지도자가 되는 것일까? 왜 그의 말이 힘을 갖게 되는 것일까?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가 그 힘을 주는 것일까? 과연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건 누구일까? 어쩌면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자야말로 실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발로쟈'야말로 그 누구보다 친구들이 이 일을 멈춰주기를, 자신의 말을 거역하기를, 자신을 비난하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다른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만약 진정 가해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해본다면 과연 가해자들 중 가장 피해자는 누구인가.

     사실 이 연극에는 내가 말한 이 세 가지보다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배우들의 힘이다. 이렇게 이야기 구조와 내용이 단순한 경우 연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건 배우들의 연기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의 몰입도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누구 하나 기울어지지 않고 다섯 명의 배우들이 팽팽하게 긴장감과 균형감을 유지했는데, 그 긴장감과 균형감이야말로 사실 이 연극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식상함을 어느정도 상쇄해 준다. 다만 초반에 몇 번인가 (건배를 하며 잔을 부딪혔을 때처럼) 진행이 정지되며 어떤 불길함을 암시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건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흐름을 방해하며 충격을 감소시킬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악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이 승리한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악이 승리한 것일까. 어떤 관객들은 선이 승리하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 악이 승리한 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 순진하고 그래서 그들의 악 역시 아직 순진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자란다. 아이들의 악 역시 자랄 것이다. 연극은 선의 선택을 남겨둔 채 끝을 맺었다. 선은 엄청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하는 데, 자신의 아이들을, 결국 선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악을 가혹하게 처단할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용서하고 감싸 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딜레마는 그 어느 쪽을 선택한다 해도 어쩌면 결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설사 아이들이 그 열쇠를 가지고 갔다고 하더라도, 혹은 아이들이 구속되어 처벌받았다고 하더라도, 혹은 아이들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연극의 결말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앉아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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