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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22. 2020

[연극] 우리 읍내






연극 : 우리 읍내

공연장소 : 노을 소극장

공연기간 : 2020년 6월17일 ~ 2020년 6월 28일

관람시간 : 2020년 6월 21일 오후 3시





     나는 원래 이번 주에 보려고 [위대한 놀이]라는 연극을 예매했었다. 그런데 공연 바로 며칠 전에 연극이 취소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코로나 사태 이후 연극이 취소된 게 벌써 여러 번이어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연극 전체가 취소된 것이 아니라 공연 기간 중 몇몇 날짜의 공연만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미 모든 날짜의 공연이 다 매진이 된 상태라 날짜를 옮길 수도 없다고 했다. 이 무슨 멍멍이 같은 경우가 있나.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른 연극을 보기 위해 서둘러 인터파크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우리 읍내]였다. 사실 전에 검색할 때에는 전혀 이 연극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극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시골 읍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 로맨스 극인 줄 알았던 것이다.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어서 재빨리 예매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매한 연극이라 그런지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다. 첫 번째 연극의 불발은 이번 주는 푹 쉬라는 계시였을까, 아니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인가.

     [위대한 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 연극에 앙심을 품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충분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데, 1부, 2부, 3부에 대한 감상이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내게는 전혀 다른 연극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 감상평도 1부, 2부, 3부로 구분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부로 말하자면 이 연극의 본질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소위 연극에 대한 연극의 방식은 언제나 신선하고 즐겁다. 그것은 진공의 무대에 공기와 웃음을 불어넣으며 어느 정도 무대를 그리고 세상을 희화하 한다. 공연은 '무대감독' 역의 배우가 등장인물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다소 색다른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 연극을 이끌어 가는 '무대감독'은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인물들과 상황을 설명하고, 무대를 연출하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제외하고, 직접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정말이지 작은 무대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쯤의 미국의 작은 읍내가 되어 극 중 인물이자 동시에 배우인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리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가상의 마을 안에서 사소한 일상이 사소하게 흘러가고, 익숙하지만 그리운 사람들이 지나가고, 아이들은 꿈을 꾸고 상처 받으며 자라나고 늙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 속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유년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초의 보수적이고 순진했던 날들에 대한 향수가 (물론 미화되고 왜곡된 향수가) 가득하다. (이 연극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유년시절과 시대의 유년시절을 겹쳐놓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희곡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인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 가족 같은 공동체, 정치에 물들지 않은 낙천성, 아버지의 든든한 권위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희생, 오직 가족만이 중심인 인생.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한 삶의 방식과 다분히 겹쳐있어서, 혹은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박탈감 때문에, 우리에게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나. 달은 여전히 하늘 높이 떠서 부드럽게 빛나며 그 모든 사연들에 무심한데, 사람들은 마치 달의 인력에 이끌리는 썰물과 밀물의 파도처럼, 태어나고 살고  죽기를 반복한다.

     사실 이 연극은 1부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 연극의 메시지와 형식, 재미는 이 1부에 전부 들어있고 사실상 완결되어 있다.  2부는 1부의 잔향에 불과할 정도로 별 내용도 없이 너무나 지루하며 (2부는 결혼이 아니라 차라리 출산을 다루어야 했다), 3부는 별안간 1부의 그 모든 의도와 형식을 자기부정하면서 스스로 왜곡해 버린다. 이것은 이 연극의 문제라기보다는 희곡 자체의 문제인데, 내가 볼 때는 거의 자기 분열 수준이다. 우선 2부는 별 내용이 없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바로 3부로 건너뛰도록 하자. 1부의 매력은 무엇보다 거리감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 속 자기 자신처럼, 연극에게 거리를 두는 연극적 시선, 전지적 3인칭 시점이 주는 강렬한 매력이 이 연극의 힘이요 중심이다. 그런데 3부에서는 별안간 연극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침몰하면서 뻔한 감정과 교훈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죽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감상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1부에서 구축한 '일상성'과 '거리감'을 배신하고 완성도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말하게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1부에서 성취된 것이다. 1부에서 나는 이미 거리감과 일상성을 통해 매 순간의 삶의 소중함과 지나가 버리는 일상에 대한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심화시키기보다는 굳이 죽은 사람들을 어둠에서 일으켜 세워서 구구절절 진부한 교훈을 늘어놓게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족 치고도 너무 거창해서 꼰대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물론 3부의 연기자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이자 '인물'이었던 연기자들이 온전히 '인물'이 되어 '인물'에게만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역시 배우들에게 몰입해 감정이 북돋아지고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는 것이다. 1부에서처럼 2부, 3부 역시 속도감 있고 무심하게, 구태여 배우들로 하여금 소리 내어 크게 외치게 하지 말고 연극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배려해야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는데...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에게 충분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연극이었다. 굳이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본 연극 중에  [빅 밀(Big Meal)]과 [인테리어즈(Interiors)]가 떠오른다. 이런 일관성과 고집이 있었다면 이 연극의 희곡도 훨씬 내적 완성도가 높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야기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휴머니즘일까? 이 희곡 작가는 죽음도 일상처럼 가볍게 지나쳐버리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호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고 위로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인간적인 마음을 잘 받았다. 그러나 연극은 인간적으로 평범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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