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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14. 2020

14



     다섯 번째 연구실은 꽤나 특이했다. 바로 앞 연구실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방은 하얗고 깨끗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연구를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깨끗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어린왕자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 혹시 여자 아이니? 내가 화장해 줄까?”


     “아니, 난 여자아이가 아닌데.”


     “아, 남자아이구나. 그럼 같이 공놀이 할래?”


     “난 남자아이도 아냐.”


     그 사람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아직 어린애로구나.”


     “하지만 난 어린애도 아닌걸.”


     “그래? 여자도, 남자도, 어린아이도 아니라니, 마치 나 같네.”


     그 사람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린왕자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린왕자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 사람이 대답했다.


     “무슨 실험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난 이미 실험을 끝냈어. 연구실에서 2년을 보낸 뒤에 저 바깥세상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


     “왜? 실험이 실패했어?”


    “실험은 대성공이었어. 하지만 정확히 내가 예상했던 성공은 아니었지.”


   “무슨 실험이었는데?”


    “너는 상당히 둔하구나.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보통은 날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기 마련인데. 사람은 이 부분에서 꽤나 예민하거든. 마치 후각처럼 말이야.”


    어린왕자는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성(性)을 없애는 실험에 참여했단다. 단순히 성별을 없애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기능과 욕망 자체를 없애고 싶었지. 한 마디로 나는 여자도 남자도 되고 싶지 않았고, 여자도 남자도 욕망하고 싶지 않았어. 수없이 괴상한 용어들과 구분들과 취향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성적인 게임들이 소모적이고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거든. 끊임없이 나를 규정짓는,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규정해야 하는 성 정체성이라는 것도 의심스럽고 부담스럽기만 했어. 모두들 그게 절대적인 근원이자 목적인양 매달리면서 상대방에게도 그걸 당연시하는 부당함도 역겹기만 했지. 결국 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성노예인 것만 같은 기분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실험에 참여했단다. 성기를 제거하고, 성호르몬을 조정하고, 뇌수술도 받았지. 실험은 성공적이었어. 나는 자유로워졌고 내 자신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어. 진정한 인간 말이야. 아유 참, 어린아이가 이런 걸 이해할 리가 없는데.”


     어린왕자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언제나 원하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거야?”


     어린왕자가 물었다.

 

    “모든 게 내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어.”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여자도 남자도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아니라는 사실보다 내가 더 이상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 않으며 그 어떤 성적인 관계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곤혹스러워했어.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마저도 나를 무시하고 경멸했지. 그들과 나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도 남아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적인 교감마저도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이야.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지만 실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슷한지 잘 알고 있거든. 하긴 놀라운 일도 아니지. 그들은 심지어 죽은 사람의 영혼에도 성기가 달려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하하, 영혼에게 성기라니.”


    그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성적인 모든 걸 제거하고 나니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어떻게 행동해도 부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 것마저도 내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어. 세상에. 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적이었던 거야. 나는 마치 철 난간이나 전봇대나 벽돌처럼 단단하고 불투명한 사물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는 다른 쪽 옷소매로 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래서 다시 이 연구실로 돌아온 거야. 그리고 내내 여기에 머물렀지. 아무것도 없는 이 하얗고 작은방이야말로 나에게 어울리는 곳이거든. 하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외로워졌어. 섹스가 그리워질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그는 킥킥거리며 웃다가 다시 눈물을 훔쳤다. 어린왕자는 그 사람의 말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그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어린왕자도 그 사람처럼 여자도, 남자도, 어린아이도 아닌데다가 성적인 기능도 욕망도 없으니까. 어쩌면 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곧 어린왕자가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어린왕자를 마치 철 난간이나 전봇대나 벽돌처럼 단단하고 불투명한 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죽은 사람의 영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믿으니까. 하, 영혼에게 눈물이라니. 어린왕자는 한숨을 내쉬며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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