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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9. 2020

[연극] 신의 아그네스



연극 : 신의 아그네스

공연장소 :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공연기간 : 2020년 11월 7일 ~ 2020년 11월 29일

관람시간 : 2020년 11월 8일 오후 3시





     사실 나는 지난주에 연극 [스카팽]을 예매했다가 취소 통보를 받았다. 당연히 코로나 때문일 거라고 짐작들 하시겠지만 놀랍게도 지난밤 명동 예술극장에 불이 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상에. 코로나도 뚫고 연극을 보겠다고 예매를 했는데 극장에 불이 나서 공연을 못 보게 되다니.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은 또 얼마나 기가 막혔을 것인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게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의 아그네스]는 어렸을 때 영화로 보았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그 당시 내가 영화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몇몇 장면이 - 박사가 담배를 피우던 장면 이라든지 비둘기가 날아다니던 장면 등등 - 떠오르는 걸 보면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주제 자체가 다소 고루해서 나는 이 연극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연극 감상을 쓰면서 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신이 나오는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촌스럽기 때문이다. 주제로 뿐만 아니라 소재나 상징, 비유로도 마찬가지다. 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도 제공할 능력이 없다. 말 그대로 신은 죽었으며 유령만이 - 놀랍게도 여전히 - 떠돌고 있을 뿐이다. [신의 아그네스]라는 연극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도 주제 때문이 아니라 삼인극이 내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신에 대한 내 평가가 어떻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말해서, 연극은 재미있었다. 주제는 역시나 다소 진부했지만, 고전적인 진지함이 향수를 자극했다. 그리고 단조롭다 할 만큼 정직하고 간결한 연출도 나는 좋았다. 이런 희곡은 최대한 단순하게 연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악마적인 한 방을 위해서 끝까지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좋다. 어쨌거나 신은 이 연극에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완벽한 부재를 통해서 말이다.  신이 교회에서 보다 무대에서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건 - 그것도 현존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재를 통해서 -  흥미롭고도 한심한 일이다.     

     이 연극의 주제는 단순하다. 그리고 예술에서 너무 많이 반복해서 다루어져서 닳고 닳았다. 우리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과 증오, 구원과 방치, 선함과 사악함, 정녕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나이까, 믿음과 이성의 반목 등등등 전혀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 가지 재미있는 요소가 전면에 등장하는데, 바로 '기적'이다. 가령 처녀가 임신하는 것과 같은 기적 말이다. 이것은 만약 현대 시대에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발칙한 -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 발상에서 시작한다. 자,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치자. 당연하게도 아무도 마리아를 믿지 않을 것이고, 사생아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마리아에게 살해당할 것이고, 마리아는 정신병원에 감금될 것이고, 기적은 갈가리 찢겨 해부당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죄의 구원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도 없이 거기서 끝나고 말겠지.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예수가 없는 이유이며, 기적이 사라진 이유이고, 신이 침묵하는 이유이다. 예수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 어쩌면 반복해서 - 살해당했던 것이다. [신의 아그네스]는 살해당한 아기 예수의 시체를 사흘 만에 다시 무덤에서 파내는데, 부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범인을 잡기 위해서다. 이것은  더 이상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과 범죄의 영역이다. 

     이 이야기는 '처녀 출산'이라는 사건에 있어서 기적과 범죄의 진위 여부를 가를 아기 아버지의 정체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한다. 아그네스는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과 수녀원에서 조차 보호받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자인가, 아니면 순수한 영혼과 믿음으로 신의 선택을 받은 성처녀 인가.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 둘은 같은 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말 신의 뜻이라면 태어나는 모든 아기의 아버지는 결국 신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아그네스를 성폭행한 것도 신이요, 아기에게 탯줄을 감아 죽인 것도 신이라는 말인가? 이런 자연스럽고도 모순된 결론에 도달했을 때 아그네스의 영혼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고로 이런 사람이 오직 아그네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멋대로 창조해 놓은 아담과 이브에게 자유의지를 내리고는 선악과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 고통과 죽음이라는 벌을 내리면서 한편으로는 사랑과 구원을 약속하는 신의 자폐적인 정신분열증에 대한 인류의 반응의 현대적인 반복에 불과하다. 인류는 사이코페스를 부모로 두었으며 그 부모의 편집증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아이의 사랑은 -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 순수한 것이다. 그 순수함으로 아그네스는 신을 낳고, 똑같은 순수함으로 그 신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매일 살해당하고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우리는 더 이상 신의 어린애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다면 누구인가가 문제로 남는데, 이 연극은 그것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답을 하지 않는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고아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망설임. 영화 [엑소시스트]처럼 [신의 아그네스]역시 신의 부재가 신의 현존만큼이나 거대하게 우리의 실존을 짓누른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옛날 추억일 뿐이지. 더 이상 신의 부재는 우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신이 죽어버린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라 [신이 태어나지 않은 시대]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신이 없이도 '처녀 출산'이 가능한 과학의 아이들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연극은 초중반부의 냉소와 침착함, 후반부의 휘몰아치는 자기 붕괴가 핵심인데 초중반부는 잘 표현이 되었지만 뒷심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모든 게 한 점에 모여 하늘 높이 뾰족하게 치솟았다가 한꺼번에 붕괴해 내리는 고통과도 같은 쾌감이 좀 더 필요했는데, 중간중간에 어쩐지 머뭇거리는 듯이 리듬이 끊기는 순간들이 있어서 동력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어쩌면 그건 개막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고백하건대 - 신에 대한 추억을 곱씹는 것에는 여전히 일말의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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