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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06. 2020

코로나 시대에 연극은 사라지는가


코미디를 나타내는 고대 그리스 연극 마스크 BC 3세기

  




     코로나 시대에 연극은 사라지는가.

     나는 감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제목을 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껏 이렇게 써보았다. 코로나 시대에 연극은 사라지는가. 아니다.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들은 제목에 낚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 예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위축되고, 부담스러워지고, 멀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방역의) 시대 정신과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극 공연 중계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 폰으로 집에서도, 전철에서도, 카페에서도 자유롭고 간편하게 연극 공연을 볼 수 있다며 분위기를 띄운다. 아니, 단지 대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마치 연극의 진화인 것처럼, 새로운 문화생활의 발현인 것처럼, 연극의 재도약과 대중화의 계기가 될 것처럼, 한마디로 말해 전화위복이라는 식의 언급을 종종 보았다. 제정신들인가? 그런 얘기를 쉽게 늘어놓는 사람들은 장담컨대 결코 연극 애호가들이 아니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왕복 4시간의 시간을 들여서 1시간짜리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로 향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아야 하는 불편과 고집이 그들에게는 미련하고 미개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는 것' 그리하여 '그 순간 그곳에 함께 있는 것' - 현장성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 은 연극의 미개한 관행이 아니라 바로 연극의 본질 자체인 것이다. 오늘날 연극을 점점 메마르게 하는 것은 코로나가 아니라 바로 이런 효율적이고 능률적이며 시대적인 접근법이다. 코로나는 단지 그것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얼마 전 [더 드레서]라는 연극을 예매했다가 코로나가 심해져서 취소하던 와중에 연극 공연 중계를 두고 [회를 통조림에 넣어 팔 수 있느냐]는 송승환 씨의 언급을 기사로 접했다. 아, 이 말은 부적절하다. 연극과 연극 중계의 차이는 단지 기호식품의 신선도의 문제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살아있는 물고기와 생선 통조림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설사 물고기를 통째로 통조림 안에 넣는다고 해도 그 둘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같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기 하나 없는 른 바닷속을  가득 떠다니는 생선 통조림들을 상상해 보라.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연극 애호가들에게 무대를 잃는 것은 교인이 교회를 잃는 것과 같다. 실제로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중계 미사가 권고되자 반발하는 교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헌금이 아쉬웠냐며 쉽게 비아냥 거렸고, 표면적으로 그것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 더 원론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신은 이 세상 어디에나 거하시는데도 왜 인간은 굳이 첨탑을 높이 세워 교회를 짓고 주말마다 그곳에 모여드는가. 미사란 예수의 희생에 -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재현에 - 직접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란 신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참여하는 것이며, 단지 신을 구경할 때 신은 신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버린다. '구경'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연극도 이와 같다. (이 앞에 썼던 글들에서 자세히 얘기했지만) 무대 위에서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린다. 우리는 그 '예수'에게 돌을 던지기 위해, 그의 발밑에 속죄하기 위해, 기도하기 위해, 그리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우리는 일상의 틈새를 찢어내기 위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내기 위해, 나 자신의 가면을 찢어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그것은 '함께 그곳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그 '함께'라는 초월적인 인격 안에서 각자가 낱낱이 그리고 한없이 고립되어 있으며 고독할지라도 말이다. 예수와 2명의 도둑은 각자의 십자가 위에서 한없이 고립되어 있었으며 또한 한없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그곳에 있었기에 그것은 어떤 '순간'이 되었고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그걸 중계로 대신하겠다고? 아주 산뜻하고 아주 간편하게? 아니, 통조림 안에 밀봉되는 것은 연극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주 산뜻하고 아주 간편하게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규격화되어 있는 통조림은 우리 자신을 자신의 사이즈에 맞추길 요구할 것이다. 통조림 사이즈에 맞추어 우리를 구겨 넣거나 남는 부분을 잘라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물론 우리는 그 통조림 안에서 한없이 신선하고 자유로울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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